“로런스 올리비에를 누가 예술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도 로런스 올리비에처럼 연기만으로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첫 맞선을 봤던 서울 혜화동 규수에게 “방송국에 다닌다고 나왔는데, 천한 배우라니 왜 나를 속였냐”는 모욕을 당한 뒤 그는 반드시 ‘진짜 예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 청년이 일흔다섯이 됐다. 연기자 이순재씨가 로렌스 올리비에 처럼 ‘경’ 칭호를 받는 귀족 수준으로 신분이 상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30대 이상들은 그를 ‘대발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 아래 또래들은 ‘야동 순재’라 그를 부르며 이웃 할아버지처럼 반긴다. 그 위 세대들에겐 ‘원조 얼짱’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 영원한 연기자다. 반면 연기자들의 세계에서 그는 더없이 깐깐한 원로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그리고 연예계 전반에 대해 그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연기자의 길을 예술가로 살아가길 바라온 그가 이번에 새로운 영예를 하나 더 얻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올해 처음 선정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연기자로는 처음 뽑힌 것이다. 그러나 지난 31일 문화방송 일일드라마 <사랑해 울지마> 녹화장에서 만난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연기자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날파리’, ‘미친 놈들’ 같은 격한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그가 만들어낸 유행어대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가벼운 세상에 그는 여전히 답답해하고 있었다.
‘반짝 스타들’ 연기공부 안하는 탓 있지만
배우 몸값만 부풀리는 방송시스템도 문제
-먼저 명예의 전당 헌정을 축하드립니다.
“내가 현역 중에 나이를 많이 먹어서 받은 것일 뿐인데…. 배우가 처음으로 방송관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점에서 기뻐요. 앞으로 후배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어요.”
-이제 70대 배우들은 정말 몇 분 안 계십니다.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신구씨 같은 분들과 함께 연기자의 정년을 늘려가고 계신데, 혹시 서로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은 안 느끼시나요?
“신구(71)씨가 라이벌이냐구요? 에이, 신구는 한국방송에서 최고였어요. 사실 나는 그렇지 않았잖아요, 하하하. 제가 60~70년대 전속되어 활동했던 동양방송(옛 TBC)은 주연을 독점하는 독주체제가 아니었어요. 문화방송에선 최불암(69)씨가 최정상에 서 있었죠. 제가 최고는 무슨…, 그분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뿐이지. 잘 모르시겠지만 40년이 넘도록 브라운관에서 그분들하고 단 한 번도 작품을 같이 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고 보니 늙은이들 모아놓고 시트콤 한판 신나게 찍는 것도 좋겠는데? 연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늙은이들 시트콤, 재미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갖고 제작을 하려는 훌륭한 분 없나, 하하하.”
-정극 연기야 정평이 나셨지만 시트콤에서 연기 변신을 보여주시는 등 고정관념을 깨는 연기도 많이 선보이셨습니다. 늘 연구가 필요하시겠어요.
“시트콤 연기라는 게 슬랩스틱 코미디로 만만치 않은 장르예요. 연구가 필요하죠. 물론 연기의 깊이보다는 동작, 표정, 목소리 톤까지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승부한다는 점이 좀 다르죠. 대사를 반복해서 들여보다 보면 관객들이 웃겠구나 하는 지점이 느껴져요. 표정, 시선, 동작, 카메라 앵글에서 빠질 때의 동선까지 다 고민하고 연구해야 진짜 코미디가 나오게 돼요. 재미있어요. 올가을에 시트콤을 다시 할 것 같아요. 이런 시절에 유쾌한 드라마로 시청자들께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건 보람된 일이죠. 어떤 역할이든 기꺼이 할 겁니다. ”
1940년대 후반, 종로의 한 극장 구석에서 <고잉 마이 웨이>의 빙 크로스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던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순재는 서울대 연극패에서 연기자의 꿈을 키우다가 60년 실험극장 창단 멤버로 연극배우가 됐다. 그리고 64년 동양방송(현 한국방송 2TV)이 개국할 때 연극배우들이 생방송으로 연기한 티브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동양방송 일원이 된다. 그 뒤 40여년 동안 그는 ‘최초’와 ‘최고’에 수도 없이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일 연속극 <눈이 내리는데>(동양방송), 최장수 일일연속극 <보통 사람들>(한국방송), 문화방송 최고 시청률 <보고 또 보고>와 <허준>까지, 그는 언제나 전성기였다.
직접 만나본 그에게선 뿜어나오는 에너지가 절로 느껴질 정도로 기력이 대단했다. 언제까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해 물어봤다. 그는 “암기력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라고 즉답하며 “미련은 없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더니 수첩을 꺼냈다. 5월까지 스케줄이 빽빽했다. 소홀히 할 것 하나 없는 많은 일정 중에서도 그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후배들을 가르치는 시간이다.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석좌교수인 그는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4시간짜리 연기 실습 강의를 맡고 있다. 수업날이 아니어도 틈이 날 때마다 학교에 들러 연기를 지도한다고 한다.
-‘연기자 이순재’라고 하면 대발이 아버지나 야동순재도 있지만 아무래도 대원군이나 영조 임금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국왕 연기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사극을 맡게 되면서 대원군의 정적까지 싸안는 통 큰 정치, 영조의 서민을 이해하는 정치를 그때마다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어요. 품격 있게 말이야. 이게 왕이다 이거지. 내 연기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죠. 대원군 연기를 할 때는 20년이 넘게 피워오던 담배도 끊었다니까.”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장자연 사건’ 늦었지만 철저히 파헤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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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운아 대원군부터 익살 맞은 할아버지 ‘야동 순재’까지 이순재는 40년 넘게 자기 이미지를 계승하고 변신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연기자이자 예술가로 살고자 하기에 그는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과 연예계를 향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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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0년대까지는 연기자들을 깔보는 사회 풍토 때문에 속도 많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권력도 연기자들을 함부로 대하던 시절이었는데, 요즘에는 좀 어떻습니까?
“못살고 억압받던 시절엔 솔직히 돈을 바라고 또는 무서워서 그걸 참고 견디는 배우들이 있었어요. 그 때는 우리 직종을 권력자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노리갯감으로 생각했으니까 …. 술자리에서 술 몇 잔 돌리고 용돈 몇 푼 주면 큰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했다구요. 그런 자리에서 옆에 앉아 있던 여자배우들 갈 때 봉투 하나 주면 수표가 들어 있었고 …. 한달 수입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어 있었던 거지, 그러다보면 뒷거래로 만나 성사시키고 …. 그런 경우가 꽤 있었다고. 세상이 점차 바뀌었다고 생각했어요. 인적자원도 좋아지고, 일반인들은 인식도 많이 바뀌었는데 ….”
결국 고 장자연씨 이야기를 피해가긴 어려웠다. 연기와 연기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에게는 더욱 참기 힘든 사건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죽었겠어요?”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인터뷰 중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장자연씨는 말야 …” 말을 잇지 못했다. 한숨 뒤 긴 쉼표, 그리고 작정한 듯 강하게 비판을 털어놨다.
“티브이에서 아무리 이유 없이 욕하고 두들겨도 용인되는 게 거지랑 배우였던 시절에 비한다면, 많이 바뀌긴 했죠. 선망하는 직업이 됐으니까. 그런데 이런 사건이 일어났네요. 속은 더 답답해진 거예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횝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철저하게 파헤쳐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이 사회에 경종을 울려야 해요. 연루된 사람들과 연예계를 둘러싼 시스템 전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방송국을 포함한 전체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배우가 되고 싶은 아이에게 정당하게 노력해서 연기력을 쌓고 그만큼 인정받는 시스템, 이건 수십년 동안 만들어놨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이라고. 지금까지 방송국은 뭘 하고 있었나요? 기획사도 마찬가지죠. 연기에 ‘연’자도 모르는 놈들을 데려다 앉혀 놓고 몸값만 부풀려 댔죠. 그런 아이들이 요행수로 클 수 있게 만든 놈들이 문제 아닌가요? 또 그렇게 요행수로 뜨는 걸 옆에서 보면서 누군들 그런 유혹이 없겠어요. 그 아이들한테 잘못이라고 책임을 돌릴 건가요?”
-자고 나면 스타가 되기도 하고 엄청난 돈을 버는 젊은 연기자들이 중심 잡기가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검증도 안 받고 연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주연 하니까 본인들은 얼마나 좋겠어요. 별천지가 따로 없죠. 발성도 안 된 상태에서, 아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좀 뜨니까 사방에서 광고 들어오지, 대우 받지, 갑자기 10배, 100배를 벌지 …. 어떻게 걔들을 뭐라고 할 수 있어요. 연기력 없이 떴다가 무능한 배우란 게 드러나면 금세 사라지는 걸 누가 책임지고 말해줬냐는 거예요. 공부하고 준비해서 나오면 오래오래 자기가 바라는 연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아이들도 그런 식으로 싹이 잘리는 거야.”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됐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진짜 배우가 된다고 누구나 인식하는 시스템, 아니 그런 고통을 통해 연기력을 다지면 당당하게 배역을 맡을 수 있고 배우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어야 하는데 …. 그걸 주관해야 하는 대가리들이 나쁘고 못된 놈들이 있으니까 결국 이렇게 된 거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장미희를 키웠던 30년 전 공채 시절이 더 나았다고.”
결국 그가 다시 강조한 것은 연기, 그것뿐이었다. 후배들에게 그가 40년 동안 터득한 유일한 길이기에 그는 더욱 강하게 후배들을 질타했다.
“공부 좀 했으면 좋겠어요. 슬픔 하나에도 수십 가지 표정이 있다고. 흉내를 내는 게 아니고 스스로 단련해서 창조할 수 있어야 해요. 예를 들면 영조를 연기한다면 영조의 정치철학 등 지적 수준은 어떤지, 인간적인 고민에 장단점은 뭔지 공부를 해야 하는 거죠. 아들을 죽인 왕, 도대체 어떤 고통과 회한이 있었을까 자기 몸으로 느끼려고 해봐야하는 거요. 그렇게 하려면 뭔가를 알아야지, 머리가 텅텅 비면 뭘 할 수 있겠냐고! 나도 아직도 공부해. 인문학을 알아야 표현을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40대 때 했던 <세일즈맨의 죽음>과 환갑 넘어서 한 <세일즈맨의 죽음>이 달랐어요. 공부해서 깨달은 거야.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 해.”
-발성도 계속 해야겠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는 지칠 틈이 없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