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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축하 전화? 차라리 라면이나 보내주지…
2005년 북극점 정복…식량 없어 3일간 '시체놀이'
히말라야 14좌 등정-3극점 정복…산악 그랜드슬램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산악 그랜드슬램이다. 세계적인 탐험가가 많아도 아무도 이런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세계 최단기간(8년 2개월) 14좌 완등, 동계 랑탕리 초등, 세계 최초 6개월간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6개봉 등정, 아시아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이게 박영석이다.
▶'서울 촌놈', 산악인 되다
어릴 때 이태원에 살았다.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바로 뒤에 남산이 있어 시골 아이들 못잖게 촌스럽게 자랐다. 가재도 잡고, 두릅도 따고, 아버지와 솥 들고 올라가 닭백숙도 해먹고.... 주말마다 아버지를 따라 들로 산으로 다니다 네 살 때 북한산 백운대(836m) 정상을 밟았고, 이후 설악산, 오대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을 수시로 올랐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선물을 받았다. 여행가 김찬삼씨가 쓴 10권짜리 '세계여행전집'이었다.
"고1 때 이사하면서 잃어버릴 때까지 100번도 더 읽었습니다. 아주 너덜너덜할 때까지 보고 또 봤어요. 북극과 히말라야 같은 대자연 사진을 보면서 탐험가를 동경했고,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77년 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를 올랐을 때는 정말 멋있는 등반가, 탐험가가 되고 싶었죠."
오산고 2학년 때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카퍼레이드를 목격했다. '마나슬루 원정대 등정 축하 퍼레이드-동국대 산악부'. 무릎을 쳤다. "저거다! 나도 저기 들어가 세계 최고가 되자!" 순간적으로 인생 항로를 잡았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해 오던 생각을 이날 매듭지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국대를 어떻게 들어가느냐였다. 책을 멀리한 게 후회가 됐다. 결국, 재수까지 해 기어이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군기 센 학과답게 연일 집합이 걸리는 통에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서야 간신히 산악부 문을 노크했고, 그 후로는 아예 산악부 룸에 가서 살았다. 한데 산악부 군기도 학과 못잖았다.
"과에서 두들겨맞고, 산악부에서 두들겨맞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물론 지금 1학년부터 다시 하라면 안 하겠지만요."
큰 산에 오르고 싶어 2학년 말 일본 북 알프스에 도전했다.
"폭설에 영하 30도의 한파까지 겹쳐 죽을 고생 했습니다. 3층짜리 산장이 지붕만 보일 정도였죠. 입산이 금지돼 있었는데 어떻게 뚫고 들어가 정상을 밟았습니다. 눈이 어떻게나 쏟아지는지 담배를 못 피울 정도였어요. 3190m 봉우리였지만, 나중에 보니 히말라야 6000~7000m급보다 더 힘든 코스였더라고요."
▶온 세상을 발 아래
88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르며 맷집을 키웠다.
아이거 북벽을 탈 때는 자신을 키운 2년 선배 허종행이 실족사하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3학년으로 복학한 89년 봄 히말라야 랑시사리 1,2봉을 연거푸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제2봉(6154m)이었다. 그래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 다시 제1봉(6427m)에 올랐다. 실수가 부른 횡재였다.
그해 겨울 26세의 역대 최연소 원정대장이 되어 히말라야 랑탕리(7025m) 동계 초등에 성공했다.
후배 2명과 팀을 꾸렸는데 돈이 없어 네팔까지 가는 항공권만 끊었고, 돌아올 때는 원주민에게 침낭이며, 시계며 가진 것 몽땅 팔아 여비를 마련했다.
장비도 다 마련하지 못해 현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빌라 에베레스트'의 신세를 졌다.
다른 원정대가 쓰고 그 집 창고에 버려둔 단프라박스를 얻어 테이프로 칭칭 감아 사용했다.
박스마다 '87년 로체원정대', '부산원정대' 등 이름이 달라 다들 어느 원정대인지 헷갈려 했다.
"오죽했으면 우릴 보고 '자투리 원정대'라고 했을까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9일 만에 등정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오래 버틸 재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빨리 해치웠죠. 덕분에 돈 덜 들이고 원정대 꾸리는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정복해 나갔다.
96년까지 초오유와 안나푸르나를 추가한 뒤 97년 들면서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가셔브룸2, 초오유, 로체 등 5개 봉을 접수, 카르솔리오(멕시코)가 보유하고 있던 한 해 8000m급 봉우리 4개 등정 기록을 갈아치웠다.
경기도 시흥의 아파트 한 채를 고스란히 털어 넣은 결과였다.
98년 시샤팡마, 낭가파르밧, 마나슬루, 99년 칸첸중가, 2000년 마칼루, 브로드피크 정상을 차례로 밟은 뒤 2001년 7월 22일 K2봉 꼭대기에 서면서 역대 아홉 번째 14좌 완등을 달성했다.
이 죽음의 행군에 걸린 시간이 8년 2개월. 세계 최단기록이다.
2002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를 오르며 7대륙 최고봉 정복까지 마무리했다.
▶그랜드슬램을 향하여
더는 오를 데가 없자 극점으로 향했다. 2003년 3월, 여섯이 북극점 도전에 나섰다. 60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출발해 1200㎞ 행군을 시작했다.
보급은 없다. 애당초 물자를 몽땅 갖고 떠난다. 식량, 연료, 카메라 장비 등 1인당 120~130㎏에 달하는 물자를 개썰매에 싣고 개 대신 끌고 가는 것이다. 북극점에 도달하면 귀환은 헬기로 한다.
위험하기로 치면 히말라야지만, 힘들기로 따지면 북극점이다.
얼음이 녹기 전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고, 무게 때문에 갖고 갈 수 있는 식량 또한 한정적이라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기록이나 사진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나섰지만, 현지에서 부딪치는 사정은 너무 달랐다.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모든 게 얼어버렸다. 전선이 얼어 부러지는 바람에 노트북이며 솔라판은 무용지물이 됐고, 카메라 필름은 감으면서 다 부서졌다.
입김은 나가면서 얼어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체온으로 생긴 습기와 땀으로 파카와 침낭은 영하 50도의 혹한에 사정없이 얼어붙었고, 텐트는 텐트대로 버너가 만든 습기가 얼어 이글루로 변해갔다.
파카는 벗을 때마다 찌지직 찌지직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침낭은 숫제 빙낭이 되었다.
얼음 깨겠다고 충격을 가하면 옷감이 찢어지니 그럴 수도 없고, 버너에 녹이자니 시간도 시간이고 연료도 생각해야 했다.
멋모르고 다운파카, 다운침낭 가져간 게 패착이었다.
"오리털은 젖으면 한 곳으로 뭉친다는 사실을 깜빡한 거죠. 파카와 침낭이 젖으면서 오리털이 한 군데로 뭉쳤고, 그게 덩어리째 얼어버린 겁니다. 나중엔 파카와 침낭이 홑겹이 되더라고요."
9㎏짜리 텐트가 열흘 지나자 20㎏이 넘었다. 얼음이 두께를 더해 갔지만 떼어낼 재간이 없으니 그냥 갖고 다닐밖에. 나중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얼음 덩어리로 변한 내피를 잘라내고 말았다.
신발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땀이 얼어 발을 압박하니 틈틈이 숟가락으로 긁어내야 했다.
화가 날 정도로 추웠다. 오죽했으면 밤새 씩씩거리며 "다시 오면 내가 개다"를 되풀이했을까.
영하 50도에서 잠은 사치다. 빙낭에 들어가 비몽사몽 시간 보내는 게 곧 잠이다. 다들 기상 시각인 새벽 4시만 기다렸다. 버너를 켤 수 있어서다. 그때 비로소 몸도 녹이고, 장갑도 말리고, 잠깐 조는 걸로 부족한 잠도 보충한다.
실은 잠보다 온기가 더 절실하다. 그래서 잠을 줄이며 새벽 3시에 일어난 적도 많다.
용을 썼는데도 행군 속도가 떨어지면서 목표로 잡았던 4월 30일 도착이 불가능해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아까워 밀어붙이려 했지만, 러시아에서 헬기를 보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더 늦어지면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포기했죠. 실패로 인한 분함보다는 이 지옥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해 겨울 방향을 남극으로 돌려 44일 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북극은 유빙을 타고 올라가지만, 남극은 땅이라 훨씬 수월했다.
▶마침내 북극점에 서다
2005년 2월 다시 북극점을 향했다. 이번엔 후배 3명(홍성택 오희준 정찬일)과 함께 넷이서 캐나다 워드헌터를 출발했다.
직선거리는 1000㎞였지만, 실제로는 2000㎞ 행군이었다. 자고 나면 얼음판이 떠내려가 있고, 다시 진군하면 또 떠내려가 있고.... 어떤 날은 10㎞를 걸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20㎞ 후퇴해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판판한 얼음판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떡 벌어진 얼음 틈새도 건너야 하고, 얼음산도 넘어야 한다. 얼음과 얼음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으면 붙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특히 얼음이 곳곳에 솟구쳐 있는 난빙지대에 잘못 들어가면 거의 죽음이다. 120㎏짜리 개썰매를 끌고 높이 몇 미터씩 되는 미끄러운 얼음산을 넘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럴 때는 온 종일 1㎞도 못 간다. 그러면 그만큼의 거리를 반드시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거리를 맞추려고 하루 20시간을 걸은 적도 있다.
"가장 무서운 건 끝없이 타협하려는 저 자신이었어요. 한 번 타협하면 끝이 없거든요. 자꾸 쉬다 보면 텐트 치고 싶고, 텐트 치면 버너 켜고 싶고.... 그래서 무조건 제 시각에 출발했죠. 500m 가다가 텐트 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기계적으로 움직였어요."
보름 남기고 도박을 했다. 남은 식량과 연료의 절반을 버린 것이다. 무게를 줄여 행군 속도를 내자는 전략이었다.
출발한 지 54일째 되는 날 GPS(위성항법장치) 수치가 90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89.998, 89.999로 이어지더니 90에 딱 맞춰졌다. 마침내 북극점에 선 것이다.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거의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죠. 탐험가 생활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은 지금 봐도 뭉클합니다."
한데 기막힌 현실이 들이닥쳤다. 식량은 떨어졌고, 연료만 조금 남았는데 기상 악화로 헬기를 띄울 수 없다는 전갈이 온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3일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움직이면 칼로리가 소모되니 그 만큼 버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할 예정이니 전화기를 켜 두라'고. 방송들은 이미 대통령이 전화로 격려했다고 속보를 내보낸 상황.
"그거 다 오보예요. 전화 안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아예 꺼버렸어요. 캐나다 쪽과 교신도 해야 하고 그래서요. '차라리 라면이나 한 박스 보내 주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침낭에서 몰래 사탕 먹고 - 동상 우려 3초만에'큰일'
① 인간이 배고파지면
식사는 좀 특별하다. 알파미라고 부르는 냉동건조 쌀에다 냉동야채, 냉동고기, 버터 한 덩어리, 냉동건조한 분말 식용유, 라면스프 등을 넣어 죽처럼 끓인다.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이렇게 먹는다. 버터와 식용유는 칼로리를 높이기 위해 넣는다.
점심은 350칼로리 비스킷 2개로 때우고 간식으로 초콜릿 바 2개를 먹는다. 그리고 단백질 분말을 뜨거운 물에 풀어 보온병에 넣어 다니며 틈틈이 마신다. 냉동식품으로 만드는 죽이니 맛있을 리 만무하다. 배에 기름기 있는 초반엔 반도 못 먹고 버린다. 1주일 지나면 다 먹는다. 열흘 지나면 없어 못 먹는다.
"한번은 간식으로 육포를 먹는데 대원 중 하나가 먹다가 자꾸 떨어뜨리더라고요. 이상하다 했더니 다 먹고 정리하면서 '어? 여기 웬 육포가...'하며 잽싸게 주워 먹는 거예요. 인간이 굶주리니까 치사해지더라고요."
누룽지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죽 끓일 때 생기는 누룽지는 막내 대원 차지였다. 근데 갈수록 죽은 줄고 누룽지가 두꺼워지는 게 아닌가. 막내가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결국, 숭늉을 끓여 똑같이 나눠 먹는 걸로 정리했다.
하루는 한 대원 침낭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지퍼를 열어보니 몰래 사탕을 까먹고 있는 게 아닌가. 바깥은 영하 50도. 궁리 끝에 침낭 속에서 완전범죄를 꾀했던 것이다.
"1차 원정 때 얼음이 벌어져 4일간 꼼짝도 못한 채 밥까지 굶고 있는데 옆 텐트에서 사탕 껍질 2개가 나와 벌을 준 적도 있습니다. 극한상황에서 배고파지면 생사고락 같이하는 동료도 잊게 되는 모양이에요. 누굴 탓하겠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긴데."
② 거시기에도 동상이...
사흘에 한 번꼴로 볼일을 본다.
먹는 게 부실해 별로 나올 것도 없지만, 그 일이야말로 진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장비가 만만찮아 해체도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장갑만도 5개다. 손가락장갑 2개와 벙어리장갑 2개를 끼고 마지막으로 스키장갑으로 푹 싼다. 그러니 옷은 어떨 것이며, 지닌 장비들은 또 어떨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사흘에 한 번도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닌 셈이다.
소변이야 통이 있어 텐트 안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하도 춥다 보니 방금 소변 받은 통을 볼에 대거나 가슴에 품기도 한다. 문제는 큰 볼일이다. 절차가 복잡한 만큼 참고 또 참았다가 다급한 사인이 오면 총알같이 장비 해체하고 3초 만에 해결한다. 내리고→누고→닦고→올리는 동작을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 지체하면 항문에 동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번개같이 처리해도 동상이 오더라고요. 껍질 까지고 쓰라리죠. 그러면 거기에 거즈를 끼우고 걸어야 합니다. 볼일보다 보면 소변 나오게 마련이고, 마지막 한 방울은 거시기 끝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순식간에 얼어 거기에도 동상이 생깁니다. 누구라고 밝히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너무 오래 참아 텐트에서 뛰어나가다가 옷에 지린 대원도 있습니다."
③ 영하 50도에서 얼지 않는 건?
수심 3000m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판은 약한 곳이 많다. 폭이 100m나 되는 얼음 땅이 고무판처럼 출렁거리기도 한다.
스키 스틱으로 찔러 물이 나오면 돌아간다. 돌아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대원들이 수시로 바다에 빠진다. 바닷물은 영하 3도밖에 안 된다. 한데 바깥은 영하 50도라 빠졌다고 허겁지겁 건져 올리면 그 자리서 얼어 죽는다.
그대로 물에 넣어둔 채 가라앉지 않도록 붙들어만 주고, 나머지 대원은 텐트를 친 뒤 버너에 불을 붙인다. 텐트 내부에 온기가 돌 때 비로소 건져 올려 텐트로 집어넣는다. 비상용 옷으로 갈아입히고, 젖은 옷은 버너에 말린다.
"하루에 한둘은 꼭 빠집니다. 2차 원정 초반에는 제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약이 올라 젖은 채로 걷다가 하체에 동상 걸려 고생했습니다. 그 추위에도 휘발유하고 고추장은 안 얼더라고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히말라야 14좌에 코리안루트 만드는 게 목표"
▶이제는 새길 내러 간다 산에서 일곱 명을 잃었다. 크레바스에 빠져 시신조차 못 찾은 대원도 있다. 그런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갔다.
더 이상 오르는 건 의미가 없어 아예 새 길을 내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 산악인들이 남이 뚫어 놓은 길로만 다니는 게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타깃으로 잡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다는 얘기. 아닌 게 아니라 2007년 1차 원정 때 8000m 지점에서 후배 둘을 눈폭풍에 날려보냈다. 작년 2차 원정에선 8200m까지 올라갔으나 광풍에 모든 것 잃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5월 기어이 '박's 코리안루트'를 개척했다. 에베레스트에 18번째, 남서벽에 3번째로 난 길이다.
1975년 영국팀이 남서벽 첫 길을 낼 때 대원 30명에 셰르파가 300명 동원됐다. 1982년 소련팀이 두 번째 루트를 뚫을 때는 대원 20명에 셰르파 70명이 붙었다.
한국팀은 대원 5명에 셰르파 7명이 전부였다. "8830m 지점에 도달하니 로프가 50m짜리 두 동밖에 안 남더라고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후회를 했죠. '내가 왜 길 낸다고 이 미친 짓을 하나'하고요. 그래도 세계 최고봉에 새 길을 낸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뭘까. 오를 데 다 올랐고, 갈 데 다 갔고, 새 길까지 뚫었는데. "탐험가, 산악인에게는 정년이 없습니다.
앞으로 히말라야 14좌에 차례로 코리안루트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내년 3월 중순 히말라야로 갑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루트 만들러." 박영석 대장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