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좋은느낌/원철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모아보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Notice

    2009. 11. 11. 14:48 시사/요즘 세상은
      
    ▲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1만㎡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모종혁
     병마용

      
    ▲ 1호갱 뒤에는 발굴되어 갓 복원작업을 끝낸 병마용이 늘어 서 있다. 병사들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 모종혁
     병마용

     

    일곱 명 농민들, 관개용 우물을 파다 진시황 병마용을 발견하다

     

    1974년 3월 어느 날 아침 중국 내륙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의 한 작은 마을 시양(西楊)촌.

     

    양페이옌(楊培彦), 양즈파(楊志發), 양취안이(楊全義) 등 일곱 명의 농민이 땅을 파 내려갔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가자 마을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한창 땅을 파내려 가던 중 곡괭이 끝에 사람 모양의 도용(陶俑)이 걸려 나왔다. 옛날부터 시양촌 곳곳에서는 파손된 토용 조각이 발견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사람의 몸통 모양을 완벽히 갖춘 토용(土俑)이었다. 몸통 옆에는 사람 얼굴과 똑같은 도용도 발견됐다.

     

    오늘날 세계 제8대 기적으로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이 지하 속에서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진시황릉과 달리 2200여 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보물의 출현이었다.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대륙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발견되어 발굴작업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에 이은 쾌거였다.

     

    중국정부는 곧바로 1년여의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은 1만4260㎡에 달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도 잇따라 발견됐다. 2호 갱과 3호 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이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3군을 보급·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비어있었다.

     

      
    ▲ 병마용박물관 표지석과 2호갱의 외경. 2호갱은 1호갱 바로 옆에 있다.
    ⓒ 모종혁
     병마용

     

      
    ▲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모종혁
     병마용

    강력한 제국 진,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다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 말기로, 일곱 제후국이 협력과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호전적이고 강대하여 나머지 여섯 나라들이 야만국이라 멸시하고 경계했다.

     

    진이 부강한 이유는 강력한 법치주의와 관료제 덕분이었다.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탄탄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토록 영원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제국 진이 짧은 시간에 멸망한 것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형 토목사업과 화려한 궁전·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쥐어짰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 무덤인 진시황릉 등이 대표적이다.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지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통일제국 아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민심과는 달리 진나라 조정은 수탈과 착취에 골몰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오늘날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사후에 잠들 자신의 능묘를 기원전 246년부터 208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건설했다. 능원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까지 묻혀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

     

      
    ▲ 뒤쪽에서 바라 본 1호갱의 앞면. 문과 벽이 있는 지하궁전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모종혁
     병마용

      
    ▲ 아직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의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에 달한다. 지난 6월 24년 만에 3차 발굴이 재개됐다.
    ⓒ 모종혁
     병마용

     

    1987년 병마용과 진시황릉, 중국 최초 세계문화유산 등재

     

    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더불어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미이라3: 황제의 무덤>에서는 미이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명성과 달리 병마용의 발굴 작업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 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

     

    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1985년에 이뤄진 2차 발굴까지 해서 1호갱은 기본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두 차례의 발굴로 1000여 점의 병사용, 6대의 전차용, 24대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을 출토됐다. 1호갱은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점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지난 6월에는 2차 발굴이 있은 지 24년 만에 1호갱에 대한 발굴이 재개됐다. 1, 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3차 작업에서는 우선 200㎡를 발굴하고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3차 발굴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앞뒤로 일렬이 된 4두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4두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출토됐다.

     

      
    ▲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 모종혁
     병마용

      
    ▲ 본래 병마용은 모두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2호갱에서는 채색이 완벽하게 보존된 병마용 6개가 발굴됐다.
    ⓒ 모종혁
     병마용

     

    "현 중국 고고학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 "발굴 과정에서 도용 손상될 것"

     

    성과가 있지만 1호갱의 재발굴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왜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성 고고학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시안 지역 학자들은 발굴을 적극 지지한다. 그들은 "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현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에 대해 베이징(北京)대학 왕쉰(王迅), 자오화청(趙化城) 교수 등 주류 역사학계는 "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며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반박한다.

     

    3차 발굴을 전후해 중국 포털사이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가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

     

    실제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

     

    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최소 한 달이 걸리고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병마용이 퇴색뿐만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 주범이다.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면서 갱 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 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갱 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병마용은 얼굴 모습과 표정이 생생하다. 말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릴 듯한 활력이 느껴진다.
    ⓒ 모종혁
     병마용

     

      
    ▲ 전장에서의 전투 전 긴 창을 끼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병사용.
    ⓒ 모종혁
     병마용

    병사들 자세 단 한 개도 같지 않아, 얼굴 표정도 인간 심리 섬세히 묘사

     

    병마용의 발굴이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가치가 황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 조합해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얼굴 표정도 각양각색으로 인간의 심리를 섬세히 묘사했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이런 천문학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에 중국정부도 병마용 발굴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한 뒤 본격적인 발굴은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도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병마용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포츠센터를 연상케 한다. 박물관 표지석 앞에 1호갱, 그 옆에는 2호갱, 오른쪽으로는 청동거마(靑銅車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공개된 세 갱 중 가장 큰 1호갱 내부는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부분의 군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서 있다. 모두 3열로 매 열마다 68점, 총 204점이 있다. 머리는 속발을 하고 다리에는 행전을 맸으며 손에 궁을 들어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선봉부대임을 알 수 있다.

     

    경보병용 뒤는 11개 동·서 방향 통로가 갈라져 있는데, 38대의 전차와 보병이 서로 엇갈려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긴 창, 칼, 활 등 병장기를 든 중보병이다. 전차와는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날카롭다.

     

    1호갱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병사용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에 해당한다.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 주 임무다. 갱 내 뒤에 서있는 병사용은 군진의 후위이다. 부대 진군시 적이 배후에서 기습하는 것을 방어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한다.

     

      
    ▲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 모종혁
     병마용

     

      
    ▲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1/2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 모종혁
     진시황

    지휘부인 3호갱, 병사부대인 1, 2호갱 뒤에 위치

     

    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다. 길이 124m, 넓이 98m에 달한다. 기초 조사로 2호갱에는 전차에 메인 마용 350점, 기병용 마용 116점, 각종 병사용 900여 점 등 1400여 점의 병마용과 89대의 목제 전차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병·기병·전차가 혼합 편성한 군진인 셈이다.

     

    2호갱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배치했다. 첫째 진은 곡형진의 선봉으로 330여 점의 궁수(弓手)로 구성됐다. 중앙의 160점은 중장비한 갑옷을 입은 병사용으로 8열 종대로 자리 잡았다. 둘레는 170여 점의 경무장한 입사(立射)용이 진을 에워쌓다.

     

    둘째 진은 곡형진 우측에 64대의 전차로 구성됐다. 전차마다 3명의 병사가 타고 있는데, 전차 앞뒤로 수행하는 보병이 없어 순수한 전차편대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곡형진 중앙으로 전차,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넷째 진은 곡형진 좌측에 위치한 기병대다. 108점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가 보조한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다.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어 날렵해 보인다.

     

    2호갱 내에서 발굴된 병사용과 마용, 병기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휘부인 3호갱은 1, 2호갱 뒤편에 있다. 병사용 66점, 전차를 끄는 마마 4필, 목제 전차 1대가 출토됐다. 병사용은 손에 의장용 병기인 동수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정렬하여 지휘관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3호갱이 '군막'(軍幕),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호갱 앞에 있는 청동거마전시관에는 1978년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채색 동거마(銅車馬)와 병마용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거마는 모두 2대로, 진시황릉 서쪽의 한 부장갱에서 출토됐다. 발굴시 길이 7m, 넓이 2.3m의 대형 나무관 속에 놓여 있었다.

     

    청동거마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해당한다. 두 대의 청동거마는 모두 네 필의 구리 말에 매여 있지만 모습과 구조는 다르다. 차형이 크고 장식이 화려하며 모방도 정교해 중국 내에 발굴된 청동거마 중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 모종혁
     진시황

     

      
    ▲ 진시황이 전국시대 제후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담은 부조도.
    ⓒ 모종혁
     진시황

    병마용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 발굴은 37년 동안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완공 당시 전체 부지는 50㎢, 봉분 높이는 120m에 달했다.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황제 능원이다.

     

    진시황릉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다. 하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약탈을 피했다.

     

    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해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지하궁전이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진시황의 바람과 달리 통일제국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러나 진은 '중국'(China)이라는 이름과 병마용, 진시황릉을 남겼다. 진시황이 남긴 성과는 오늘날까지 불로장생하고 있는 셈이다.

     

    # 여행Tip

     

    병마용박물관은 시안시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병마용에 가려면 시안 기차역에서 병마용과 진시황릉으로 가는 전용 관광버스 306번을 타면 된다. 버스비는 7위안(한화 약 1200원)이고, 30분마다 출발한다. 좌석은 넓고 냉방도 잘되어 승차감이 좋다. 시안역에서 병마용까지는 약 50분이 소요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30~17:30, 겨울철 08:30~17:00이다. 입장료는 90위안(약 1만5300원)이다. 최근에는 병마용을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어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가 경내에 있다. 가이드비는 90위안이다.

     

    진시황릉은 병마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 내리면 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매일 8:30~17:30이다. 입장료는 50위안(약 8500원)이다. 여기는 한국어 가이드가 따로 없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