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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느낌/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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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12. 17. 13:19 시사/요즘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연예인 중 한 명…배우 장진영!!

     

    암투병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는데 9월 어느 날 투병 중이던 암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리가 마음을 정말 아프게 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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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1일 세상을 뜬 영화배우 장진영씨의 남편 김영균씨는 당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담아 추도사를 썼으나 읽지 못했다. 그가 그녀와의 사랑얘기를 담은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김영사)을 펴내면서 읽지 못한 추도문을 에필로그로 실었다. 헤어지는 애통함과 더 많이 안아주지 못한 안타까움, 다시 만날 희망이 절절하게 녹아있다.
    ‘읽지 못한 추도문’
    결혼을 한다면 가을이 좋겠어요.
    그리고 축가로 듣고 싶은 곡이 있어요.
    들려줄 거죠?
    김동규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사랑하는 나의 사람 진영,
    지금 밝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네 사진을 보니,
    정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간절히 바라고 빌었는데
    결국 이 시간이 오고 말았구나.
    진영아, 너를 만나고 내가 얼마나 기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너라는 아름다운 사람이 내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주어
    이 세상 살아가는 데 힘이 되고 행복했다.
    이렇게 너를 보내는 글을 쓰는 이 시간,
    너무 잔인해서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그렇지만 내 품에서 너의 마지막 숨결을 느꼈을 때 그랬듯,
    이제는 너를 고통없는 세상, 아픔 없는 머나먼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기억하니?우리가 나눴던 많은 시간들,
    아름다운 추억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자며 굳게 맹세하던 순간들을.
    불과 얼마 전까지도 “퇴원하면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며 웃음짓던
    네 얼굴이 내 가슴에 아련한데, 넌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니?
    남들처럼 예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살자고 하더니....
    감기지 않는 네 눈을 손으로 감겨주며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난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하느님을 원망하고 눈물짓던 네 모습.
    그래, 세상에 미련이 많았겠지.
    안다. 내가 다 알아.
    얼마나 살고 싶어 했는지.
    진영아, 미안하다.
    그동안 너를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이렇게 떠나야 하는 너를 붙잡을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진다.
    너와의 이별이 이렇게 갑자기 올 줄 알았으면
    더 가슴 깊이 안아주고
    더 사랑하고
    더 아껴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나를 용서하기 바란다.
    너를 생각할 때마다 시린 눈물이 흘러 멈출 수가 없구나.
    고백할 게 있어, 진영아.
    사실 암이 발견된 후, 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괴로움에
    한없이 약해졌다.
    그래도 남자랍시고 너에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
    혼자 강한 척하며 돌아다녔지.
    그런데 너는 오히려 의연한 모습으로 정말 씩씩하게 버텨내더구나.
    그래, 넌 참 당당하고 멋진 여자야.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배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배우.
    알지? 네가 내 연인인 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했는지.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난 정말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진영아, 우리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고마웠다고 말을 해줘야 하는데,
    다음 생을 또 살게 되더라도
    기필코 다시 만나 사랑하겠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으니....
    떠나는 너를 편히 보내줘야 하는데....
    너를 보내면 많이 생각날 텐데, 많이 그림고 아파올 텐데....
    내게 다시 돌아오면 안 되니?
    네가 없으니, 널 보지 못하니 미칠 것만 같다.
    정말 사랑했다는 말이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너의 말이
    내 가슴속에 박혀 숨을 쉬면 한숨이 되어 나오고,
    눈을 감으면 눈물이 되어 그치질 않는다.
    이제는 널 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앞으로 너를 조금씩 잊으면서 살아가겠지.
    조금씩 무뎌지며 살아가겠지.
    하지만 널 가슴에 품고 열심히 살아볼게.
    그러니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말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가길 바란다.
    진영아,
    네가 있는 그곳엔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었으면 좋겠다.
    하느님, 우리 진영이를 부탁합니다.
    제발 불쌍히 여기시고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세요.
    진영아, 언젠가 다시 만날거야.
    그때 만나서 오래오래 사랑하자.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 그때까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다시 만나는 날까지 널 가슴에 품고 살아갈게.
    잘 가, 내 소중한 사람
    정말 많이 행복했다.
    2009년9월4일 영원한 너의 사랑 김영균.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12. 14. 18:08 시사/요즘 세상은
    원문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4/20091214011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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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축하 전화? 차라리 라면이나 보내주지…
    2005년 북극점 정복…식량 없어 3일간 '시체놀이'
    히말라야 14좌 등정-3극점 정복…산악 그랜드슬램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성한 산악 그랜드슬램이다. 세계적인 탐험가가 많아도 아무도 이런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세계 최단기간(8년 2개월) 14좌 완등, 동계 랑탕리 초등, 세계 최초 6개월간 히말라야 8000m급 5개봉 등정,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6개봉 등정, 아시아 최초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세계 최단기간 무보급 남극점 도달.... 이게 박영석이다.


    ▶'서울 촌놈', 산악인 되다

    어릴 때 이태원에 살았다. 서울 한복판이었지만 바로 뒤에 남산이 있어 시골 아이들 못잖게 촌스럽게 자랐다. 가재도 잡고, 두릅도 따고, 아버지와 솥 들고 올라가 닭백숙도 해먹고.... 주말마다 아버지를 따라 들로 산으로 다니다 네 살 때 북한산 백운대(836m) 정상을 밟았고, 이후 설악산, 오대산,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을 수시로 올랐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선물을 받았다. 여행가 김찬삼씨가 쓴 10권짜리 '세계여행전집'이었다.

    "고1 때 이사하면서 잃어버릴 때까지 100번도 더 읽었습니다. 아주 너덜너덜할 때까지 보고 또 봤어요. 북극과 히말라야 같은 대자연 사진을 보면서 탐험가를 동경했고,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77년 고상돈 선배가 에베레스트를 올랐을 때는 정말 멋있는 등반가, 탐험가가 되고 싶었죠."

    오산고 2학년 때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카퍼레이드를 목격했다. '마나슬루 원정대 등정 축하 퍼레이드-동국대 산악부'. 무릎을 쳤다. "저거다! 나도 저기 들어가 세계 최고가 되자!" 순간적으로 인생 항로를 잡았다. 어쩌면 어릴 때부터 해 오던 생각을 이날 매듭지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동국대를 어떻게 들어가느냐였다. 책을 멀리한 게 후회가 됐다. 결국, 재수까지 해 기어이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군기 센 학과답게 연일 집합이 걸리는 통에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서야 간신히 산악부 문을 노크했고, 그 후로는 아예 산악부 룸에 가서 살았다. 한데 산악부 군기도 학과 못잖았다.

    "과에서 두들겨맞고, 산악부에서 두들겨맞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물론 지금 1학년부터 다시 하라면 안 하겠지만요."

    큰 산에 오르고 싶어 2학년 말 일본 북 알프스에 도전했다.

    "폭설에 영하 30도의 한파까지 겹쳐 죽을 고생 했습니다. 3층짜리 산장이 지붕만 보일 정도였죠. 입산이 금지돼 있었는데 어떻게 뚫고 들어가 정상을 밟았습니다. 눈이 어떻게나 쏟아지는지 담배를 못 피울 정도였어요. 3190m 봉우리였지만, 나중에 보니 히말라야 6000~7000m급보다 더 힘든 코스였더라고요."


    ▶온 세상을 발 아래

    88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르며 맷집을 키웠다.

    아이거 북벽을 탈 때는 자신을 키운 2년 선배 허종행이 실족사하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3학년으로 복학한 89년 봄 히말라야 랑시사리 1,2봉을 연거푸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올랐는데 알고 보니 제2봉(6154m)이었다. 그래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와 다시 제1봉(6427m)에 올랐다. 실수가 부른 횡재였다.

    그해 겨울 26세의 역대 최연소 원정대장이 되어 히말라야 랑탕리(7025m) 동계 초등에 성공했다.

    후배 2명과 팀을 꾸렸는데 돈이 없어 네팔까지 가는 항공권만 끊었고, 돌아올 때는 원주민에게 침낭이며, 시계며 가진 것 몽땅 팔아 여비를 마련했다.

    장비도 다 마련하지 못해 현지 한국인 게스트하우스 '빌라 에베레스트'의 신세를 졌다.

    다른 원정대가 쓰고 그 집 창고에 버려둔 단프라박스를 얻어 테이프로 칭칭 감아 사용했다.

    박스마다 '87년 로체원정대', '부산원정대' 등 이름이 달라 다들 어느 원정대인지 헷갈려 했다.

    "오죽했으면 우릴 보고 '자투리 원정대'라고 했을까요.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지 9일 만에 등정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오래 버틸 재간이 있습니까. 그래서 빨리 해치웠죠. 덕분에 돈 덜 들이고 원정대 꾸리는 노하우를 터득했습니다."

    93년 5월 16일 에베레스트(8848m) 무산소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정복해 나갔다.

    96년까지 초오유와 안나푸르나를 추가한 뒤 97년 들면서 다울라기리, 가셔브룸1, 가셔브룸2, 초오유, 로체 등 5개 봉을 접수, 카르솔리오(멕시코)가 보유하고 있던 한 해 8000m급 봉우리 4개 등정 기록을 갈아치웠다.

    경기도 시흥의 아파트 한 채를 고스란히 털어 넣은 결과였다.

    98년 시샤팡마, 낭가파르밧, 마나슬루, 99년 칸첸중가, 2000년 마칼루, 브로드피크 정상을 차례로 밟은 뒤 2001년 7월 22일 K2봉 꼭대기에 서면서 역대 아홉 번째 14좌 완등을 달성했다.

    이 죽음의 행군에 걸린 시간이 8년 2개월. 세계 최단기록이다.

    2002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오세아니아 최고봉 칼스텐츠,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를 오르며 7대륙 최고봉 정복까지 마무리했다.


    ▶그랜드슬램을 향하여

    더는 오를 데가 없자 극점으로 향했다. 2003년 3월, 여섯이 북극점 도전에 나섰다. 60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출발해 1200㎞ 행군을 시작했다.

    보급은 없다. 애당초 물자를 몽땅 갖고 떠난다. 식량, 연료, 카메라 장비 등 1인당 120~130㎏에 달하는 물자를 개썰매에 싣고 개 대신 끌고 가는 것이다. 북극점에 도달하면 귀환은 헬기로 한다.

    위험하기로 치면 히말라야지만, 힘들기로 따지면 북극점이다.

    얼음이 녹기 전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고, 무게 때문에 갖고 갈 수 있는 식량 또한 한정적이라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기록이나 사진으로 충분히 공부하고 나섰지만, 현지에서 부딪치는 사정은 너무 달랐다.

    출발한 지 사흘 만에 모든 게 얼어버렸다. 전선이 얼어 부러지는 바람에 노트북이며 솔라판은 무용지물이 됐고, 카메라 필름은 감으면서 다 부서졌다.

    입김은 나가면서 얼어 수염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체온으로 생긴 습기와 땀으로 파카와 침낭은 영하 50도의 혹한에 사정없이 얼어붙었고, 텐트는 텐트대로 버너가 만든 습기가 얼어 이글루로 변해갔다.

    파카는 벗을 때마다 찌지직 찌지직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침낭은 숫제 빙낭이 되었다.

    얼음 깨겠다고 충격을 가하면 옷감이 찢어지니 그럴 수도 없고, 버너에 녹이자니 시간도 시간이고 연료도 생각해야 했다.

    멋모르고 다운파카, 다운침낭 가져간 게 패착이었다.

    "오리털은 젖으면 한 곳으로 뭉친다는 사실을 깜빡한 거죠. 파카와 침낭이 젖으면서 오리털이 한 군데로 뭉쳤고, 그게 덩어리째 얼어버린 겁니다. 나중엔 파카와 침낭이 홑겹이 되더라고요."

    9㎏짜리 텐트가 열흘 지나자 20㎏이 넘었다. 얼음이 두께를 더해 갔지만 떼어낼 재간이 없으니 그냥 갖고 다닐밖에. 나중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얼음 덩어리로 변한 내피를 잘라내고 말았다.

    신발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땀이 얼어 발을 압박하니 틈틈이 숟가락으로 긁어내야 했다.

    화가 날 정도로 추웠다. 오죽했으면 밤새 씩씩거리며 "다시 오면 내가 개다"를 되풀이했을까.

    영하 50도에서 잠은 사치다. 빙낭에 들어가 비몽사몽 시간 보내는 게 곧 잠이다. 다들 기상 시각인 새벽 4시만 기다렸다. 버너를 켤 수 있어서다. 그때 비로소 몸도 녹이고, 장갑도 말리고, 잠깐 조는 걸로 부족한 잠도 보충한다.

    실은 잠보다 온기가 더 절실하다. 그래서 잠을 줄이며 새벽 3시에 일어난 적도 많다.

    용을 썼는데도 행군 속도가 떨어지면서 목표로 잡았던 4월 30일 도착이 불가능해졌다. 그동안의 고생이 아까워 밀어붙이려 했지만, 러시아에서 헬기를 보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더 늦어지면 얼음이 녹아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포기했죠. 실패로 인한 분함보다는 이 지옥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막혔습니다."

    그해 겨울 방향을 남극으로 돌려 44일 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북극은 유빙을 타고 올라가지만, 남극은 땅이라 훨씬 수월했다.


    ▶마침내 북극점에 서다

    2005년 2월 다시 북극점을 향했다. 이번엔 후배 3명(홍성택 오희준 정찬일)과 함께 넷이서 캐나다 워드헌터를 출발했다.

    직선거리는 1000㎞였지만, 실제로는 2000㎞ 행군이었다. 자고 나면 얼음판이 떠내려가 있고, 다시 진군하면 또 떠내려가 있고.... 어떤 날은 10㎞를 걸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20㎞ 후퇴해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판판한 얼음판을 걷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떡 벌어진 얼음 틈새도 건너야 하고, 얼음산도 넘어야 한다. 얼음과 얼음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으면 붙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특히 얼음이 곳곳에 솟구쳐 있는 난빙지대에 잘못 들어가면 거의 죽음이다. 120㎏짜리 개썰매를 끌고 높이 몇 미터씩 되는 미끄러운 얼음산을 넘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이럴 때는 온 종일 1㎞도 못 간다. 그러면 그만큼의 거리를 반드시 보충해야 한다. 그래서 거리를 맞추려고 하루 20시간을 걸은 적도 있다.

    "가장 무서운 건 끝없이 타협하려는 저 자신이었어요. 한 번 타협하면 끝이 없거든요. 자꾸 쉬다 보면 텐트 치고 싶고, 텐트 치면 버너 켜고 싶고.... 그래서 무조건 제 시각에 출발했죠. 500m 가다가 텐트 치는 한이 있어도 일단은 기계적으로 움직였어요."

    보름 남기고 도박을 했다. 남은 식량과 연료의 절반을 버린 것이다. 무게를 줄여 행군 속도를 내자는 전략이었다.

    출발한 지 54일째 되는 날 GPS(위성항법장치) 수치가 90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89.998, 89.999로 이어지더니 90에 딱 맞춰졌다. 마침내 북극점에 선 것이다.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지구 3극점을 모두 밟은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거의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죠. 탐험가 생활 중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북극점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은 지금 봐도 뭉클합니다."

    한데 기막힌 현실이 들이닥쳤다. 식량은 떨어졌고, 연료만 조금 남았는데 기상 악화로 헬기를 띄울 수 없다는 전갈이 온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3일간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움직이면 칼로리가 소모되니 그 만큼 버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축하전화를 할 예정이니 전화기를 켜 두라'고. 방송들은 이미 대통령이 전화로 격려했다고 속보를 내보낸 상황.

    "그거 다 오보예요. 전화 안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아예 꺼버렸어요. 캐나다 쪽과 교신도 해야 하고 그래서요. '차라리 라면이나 한 박스 보내 주지' 하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침낭에서 몰래 사탕 먹고 - 동상 우려 3초만에'큰일'


    ① 인간이 배고파지면

    식사는 좀 특별하다. 알파미라고 부르는 냉동건조 쌀에다 냉동야채, 냉동고기, 버터 한 덩어리, 냉동건조한 분말 식용유, 라면스프 등을 넣어 죽처럼 끓인다.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이렇게 먹는다. 버터와 식용유는 칼로리를 높이기 위해 넣는다.

    점심은 350칼로리 비스킷 2개로 때우고 간식으로 초콜릿 바 2개를 먹는다. 그리고 단백질 분말을 뜨거운 물에 풀어 보온병에 넣어 다니며 틈틈이 마신다. 냉동식품으로 만드는 죽이니 맛있을 리 만무하다. 배에 기름기 있는 초반엔 반도 못 먹고 버린다. 1주일 지나면 다 먹는다. 열흘 지나면 없어 못 먹는다.

    "한번은 간식으로 육포를 먹는데 대원 중 하나가 먹다가 자꾸 떨어뜨리더라고요. 이상하다 했더니 다 먹고 정리하면서 '어? 여기 웬 육포가...'하며 잽싸게 주워 먹는 거예요. 인간이 굶주리니까 치사해지더라고요."

    누룽지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죽 끓일 때 생기는 누룽지는 막내 대원 차지였다. 근데 갈수록 죽은 줄고 누룽지가 두꺼워지는 게 아닌가. 막내가 잔머리를 굴린 것이다. 결국, 숭늉을 끓여 똑같이 나눠 먹는 걸로 정리했다.

    하루는 한 대원 침낭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지퍼를 열어보니 몰래 사탕을 까먹고 있는 게 아닌가. 바깥은 영하 50도. 궁리 끝에 침낭 속에서 완전범죄를 꾀했던 것이다.

    "1차 원정 때 얼음이 벌어져 4일간 꼼짝도 못한 채 밥까지 굶고 있는데 옆 텐트에서 사탕 껍질 2개가 나와 벌을 준 적도 있습니다. 극한상황에서 배고파지면 생사고락 같이하는 동료도 잊게 되는 모양이에요. 누굴 탓하겠어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긴데."

    ② 거시기에도 동상이...

    사흘에 한 번꼴로 볼일을 본다.

    먹는 게 부실해 별로 나올 것도 없지만, 그 일이야말로 진정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장비가 만만찮아 해체도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장갑만도 5개다. 손가락장갑 2개와 벙어리장갑 2개를 끼고 마지막으로 스키장갑으로 푹 싼다. 그러니 옷은 어떨 것이며, 지닌 장비들은 또 어떨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사흘에 한 번도 결코 적은 횟수는 아닌 셈이다.

    소변이야 통이 있어 텐트 안에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하도 춥다 보니 방금 소변 받은 통을 볼에 대거나 가슴에 품기도 한다. 문제는 큰 볼일이다. 절차가 복잡한 만큼 참고 또 참았다가 다급한 사인이 오면 총알같이 장비 해체하고 3초 만에 해결한다. 내리고→누고→닦고→올리는 동작을 순식간에 끝내야 한다. 지체하면 항문에 동상이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리 번개같이 처리해도 동상이 오더라고요. 껍질 까지고 쓰라리죠. 그러면 거기에 거즈를 끼우고 걸어야 합니다. 볼일보다 보면 소변 나오게 마련이고, 마지막 한 방울은 거시기 끝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순식간에 얼어 거기에도 동상이 생깁니다. 누구라고 밝히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너무 오래 참아 텐트에서 뛰어나가다가 옷에 지린 대원도 있습니다."

    ③ 영하 50도에서 얼지 않는 건?

    수심 3000m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판은 약한 곳이 많다. 폭이 100m나 되는 얼음 땅이 고무판처럼 출렁거리기도 한다.

    스키 스틱으로 찔러 물이 나오면 돌아간다. 돌아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대원들이 수시로 바다에 빠진다. 바닷물은 영하 3도밖에 안 된다. 한데 바깥은 영하 50도라 빠졌다고 허겁지겁 건져 올리면 그 자리서 얼어 죽는다.

    그대로 물에 넣어둔 채 가라앉지 않도록 붙들어만 주고, 나머지 대원은 텐트를 친 뒤 버너에 불을 붙인다. 텐트 내부에 온기가 돌 때 비로소 건져 올려 텐트로 집어넣는다. 비상용 옷으로 갈아입히고, 젖은 옷은 버너에 말린다.

    "하루에 한둘은 꼭 빠집니다. 2차 원정 초반에는 제가 빠진 적이 있습니다. 약이 올라 젖은 채로 걷다가 하체에 동상 걸려 고생했습니다. 그 추위에도 휘발유하고 고추장은 안 얼더라고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히말라야 14좌에 코리안루트 만드는 게 목표"
    ▶이제는 새길 내러 간다 산에서 일곱 명을 잃었다. 크레바스에 빠져 시신조차 못 찾은 대원도 있다. 그런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다시 히말라야로 갔다.
    더 이상 오르는 건 의미가 없어 아예 새 길을 내기로 했다. 그동안 한국 산악인들이 남이 뚫어 놓은 길로만 다니는 게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타깃으로 잡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그만큼 위험하고 힘들다는 얘기. 아닌 게 아니라 2007년 1차 원정 때 8000m 지점에서 후배 둘을 눈폭풍에 날려보냈다. 작년 2차 원정에선 8200m까지 올라갔으나 광풍에 모든 것 잃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5월 기어이 '박's 코리안루트'를 개척했다. 에베레스트에 18번째, 남서벽에 3번째로 난 길이다.
    1975년 영국팀이 남서벽 첫 길을 낼 때 대원 30명에 셰르파가 300명 동원됐다. 1982년 소련팀이 두 번째 루트를 뚫을 때는 대원 20명에 셰르파 70명이 붙었다.
    한국팀은 대원 5명에 셰르파 7명이 전부였다. "8830m 지점에 도달하니 로프가 50m짜리 두 동밖에 안 남더라고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후회를 했죠. '내가 왜 길 낸다고 이 미친 짓을 하나'하고요. 그래도 세계 최고봉에 새 길을 낸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뭘까. 오를 데 다 올랐고, 갈 데 다 갔고, 새 길까지 뚫었는데. "탐험가, 산악인에게는 정년이 없습니다.
    앞으로 히말라야 14좌에 차례로 코리안루트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내년 3월 중순 히말라야로 갑니다.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루트 만들러." 박영석 대장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11. 11. 14:48 시사/요즘 세상은
      
    ▲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적 1만4260㎡ 중 1만㎡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 모종혁
     병마용

      
    ▲ 1호갱 뒤에는 발굴되어 갓 복원작업을 끝낸 병마용이 늘어 서 있다. 병사들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고 얼굴 표정도 다양하다.
    ⓒ 모종혁
     병마용

     

    일곱 명 농민들, 관개용 우물을 파다 진시황 병마용을 발견하다

     

    1974년 3월 어느 날 아침 중국 내륙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의 한 작은 마을 시양(西楊)촌.

     

    양페이옌(楊培彦), 양즈파(楊志發), 양취안이(楊全義) 등 일곱 명의 농민이 땅을 파 내려갔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가자 마을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한창 땅을 파내려 가던 중 곡괭이 끝에 사람 모양의 도용(陶俑)이 걸려 나왔다. 옛날부터 시양촌 곳곳에서는 파손된 토용 조각이 발견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사람의 몸통 모양을 완벽히 갖춘 토용(土俑)이었다. 몸통 옆에는 사람 얼굴과 똑같은 도용도 발견됐다.

     

    오늘날 세계 제8대 기적으로 불리는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이 지하 속에서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진시황릉과 달리 2200여 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보물의 출현이었다.

     

    병마용의 발견은 중국 대륙을 흥분시켰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말기로, 홍위병의 광란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된 상태였다. 1971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발견되어 발굴작업이 막바지였던 마왕퇴(馬王堆)에 이은 쾌거였다.

     

    중국정부는 곧바로 1년여의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 끝에 막대한 유물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시공했다. 1호갱은 길이 230m, 넓이 62m, 총 면적은 1만4260㎡에 달했다. 1호갱 주변에서는 2호갱부터 4호갱까지도 잇따라 발견됐다. 2호 갱과 3호 갱의 규모는 각각 6000㎡와 520㎡. 1호갱보다 작지만 군대 편제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중국 고대 군대 편제와 같은 좌·중·우 3군이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3군을 보급·지원하는 4호갱도 있으나 완성되지 못한 채 비어있었다.

     

      
    ▲ 병마용박물관 표지석과 2호갱의 외경. 2호갱은 1호갱 바로 옆에 있다.
    ⓒ 모종혁
     병마용

     

      
    ▲ 오른쪽 1번 자리가 병마용이 처음 발견된 곳이다. 병마용은 농민들이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모종혁
     병마용

    강력한 제국 진, 진시황 사후 4년 만에 멸망하다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은 중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진의 군주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재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은 전국시대 말기로, 일곱 제후국이 협력과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호전적이고 강대하여 나머지 여섯 나라들이 야만국이라 멸시하고 경계했다.

     

    진이 부강한 이유는 강력한 법치주의와 관료제 덕분이었다. 주변국의 견제와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탄탄한 군사력을 갖추었다. 힘을 키워나갔던 진은 노련한 외교술과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국을 하나둘씩 제압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마지막으로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이 만세(萬歲)토록 영원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진은 진시황이 죽은 지 4년 만에 멸망했다.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제국 진이 짧은 시간에 멸망한 것은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대형 토목사업과 화려한 궁전·왕릉 건설에 국력을 낭비하고 백성들을 쥐어짰다.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거대하고 호화로운 아방궁, 세계 최대 규모 무덤인 진시황릉 등이 대표적이다.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부담을 짊어지고 고된 노역에 동원 당했다. 통일제국 아래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라 기대했던 민심과는 달리 진나라 조정은 수탈과 착취에 골몰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정치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오늘날까지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진시황은 죽은 뒤에도 대륙을 호령코자 했다. 사후에 잠들 자신의 능묘를 기원전 246년부터 208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건설했다. 능원에는 죽은 진시황을 모시기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墓群), 평소에 타던 청동거마 등까지 묻혀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부속시설 중 하나로, 통일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였다.

     

      
    ▲ 뒤쪽에서 바라 본 1호갱의 앞면. 문과 벽이 있는 지하궁전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모종혁
     병마용

      
    ▲ 아직 발굴되지 않은 1호갱의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에 달한다. 지난 6월 24년 만에 3차 발굴이 재개됐다.
    ⓒ 모종혁
     병마용

     

    1987년 병마용과 진시황릉, 중국 최초 세계문화유산 등재

     

    오늘날 병마용의 명성은 전 세계적으로 이름 높다.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세계인이 가고 싶어하는 유적지다. 1987년 12월 유네스코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만리장성, 자금성, 막고굴(莫高窟)과 더불어 중국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 참가한 중국 대표 선수단의 운동복은 병마용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됐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미이라3: 황제의 무덤>에서는 미이라 대신 병마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명성과 달리 병마용의 발굴 작업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78년 5월 1호갱 전시관 완공을 앞두고 첫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중국은 문혁 기간 동안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적인 발굴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다. 몇몇 학자의 지도에 따라 60명의 고고학 연수생과 100여 명의 군인이 발굴에 동원됐다.

     

    전시관 막바지 공사와 발굴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1호갱 현장은 항상 어수선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1979년 건국 30주년에 병마용박물관을 개관해야 했기에 발굴과 유물 수습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적으로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1985년에 이뤄진 2차 발굴까지 해서 1호갱은 기본적인 면모가 드러났다. 두 차례의 발굴로 1000여 점의 병사용, 6대의 전차용, 24대의 우마차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용을 출토됐다. 1호갱은 보병과 전차로 혼합 편성된 장방형 군진으로, 대략 6000여 점의 병사용과 40여 승의 전차용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지난 6월에는 2차 발굴이 있은 지 24년 만에 1호갱에 대한 발굴이 재개됐다. 1, 2차 발굴 후 남아있는 면적은 1만여㎡. 이번 3차 작업에서는 우선 200㎡를 발굴하고 범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3차 발굴은 첫날부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앞뒤로 일렬이 된 4두마차 2대를 처음으로 발굴해 낸 것. 4두마차 외에 채식 병마용과 토기 파편, 칠기 목기도 출토됐다.

     

      
    ▲ 고대 군대 편제상 우군에 해당하는 2호갱.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하고 발굴은 중단된 상태다.
    ⓒ 모종혁
     병마용

      
    ▲ 본래 병마용은 모두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2호갱에서는 채색이 완벽하게 보존된 병마용 6개가 발굴됐다.
    ⓒ 모종혁
     병마용

     

    "현 중국 고고학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 "발굴 과정에서 도용 손상될 것"

     

    성과가 있지만 1호갱의 재발굴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인 병마용을 왜 지금 다시 발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오난펑(焦南峰) 전 산시성 고고학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시안 지역 학자들은 발굴을 적극 지지한다. 그들은 "오늘날 발굴 기술에 있어 중국 고고학의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현 기술로 출토되는 도용을 완벽히 보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에 대해 베이징(北京)대학 왕쉰(王迅), 자오화청(趙化城) 교수 등 주류 역사학계는 "지금 조급하게 발굴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며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용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고 반박한다.

     

    3차 발굴을 전후해 중국 포털사이트 신랑(新浪)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4100여 명 중 62.5%가 발굴과 보존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기에 대규모 발굴은 피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31.1%만이 기술상 문제가 없기 때문에 1호갱을 모두 발굴해야 한다고 답했다.

     

    실제 병마용은 발굴 및 수습, 복원, 전시 과정에서 적지 않게 훼손당했다. 병마용은 땅에 묻혀있을 당시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지만, 발굴 후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1호갱 2차 발굴에서 출토된 장군용은 수습 과정에서 실수로 머리 부분이 부서졌다.

     

    발굴 과정에서 손상되거나 퇴색한 병마용을 복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최소 한 달이 걸리고 퇴색한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병마용이 퇴색뿐만 아니라 세균에 의한 대규모의 부식이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 해 200만 명 이상 병마용을 찾는 관광객들이 그 주범이다. 별다른 환기 대책 없이 1호갱을 개방하면서 갱 내부의 실내 공기가 전시 중인 병마용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우톄(周鐵) 병마용박물관 연구원은 "갱 내부에서 48종의 곰팡이균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차오쥔지(曹軍驥) 중국 지구환경과학원 대기환경소장은 "병마용을 이대로 방치하면 100년 뒤 병마용은 심각하게 부식해 탄광처럼 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병마용은 얼굴 모습과 표정이 생생하다. 말은 지금이라도 당장 달릴 듯한 활력이 느껴진다.
    ⓒ 모종혁
     병마용

     

      
    ▲ 전장에서의 전투 전 긴 창을 끼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의 병사용.
    ⓒ 모종혁
     병마용

    병사들 자세 단 한 개도 같지 않아, 얼굴 표정도 인간 심리 섬세히 묘사

     

    병마용의 발굴이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 가치가 황금보다 높기 때문이다. 병마용은 머리와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 조합해 완성했다. 병사용은 키 175~195㎝의 늠름한 체격인데 실제 사람과 흡사하다.

     

    놀라운 점은 병사들의 자세가 단 한 개도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얼굴 표정도 각양각색으로 인간의 심리를 섬세히 묘사했다. 진시황을 호위하여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의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방대한 규모와 정교함으로 병마용은 곧 이집트 피라미드, 바빌론 공중정원 등 고대 7대 기적에 더해져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게 됐다.

     

    이런 천문학적 가치와 중요성 때문에 중국정부도 병마용 발굴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발굴이 종료된 3호갱 외에 2호갱에 대해서는 시험 발굴을 통해 실체만 확인한 뒤 본격적인 발굴은 미루고 있다. 일반 중국인들도 현 시점에서의 발굴보다 후세에게 그대로 물려주자는 의견이 우세하다.

     

    병마용박물관 경내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포츠센터를 연상케 한다. 박물관 표지석 앞에 1호갱, 그 옆에는 2호갱, 오른쪽으로는 청동거마(靑銅車馬)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공개된 세 갱 중 가장 큰 1호갱 내부는 선봉, 주력, 후위, 익위 등 4부분의 군진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갱의 가장 앞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서 있다. 모두 3열로 매 열마다 68점, 총 204점이 있다. 머리는 속발을 하고 다리에는 행전을 맸으며 손에 궁을 들어 용감하고 활을 잘 쏘는 선봉부대임을 알 수 있다.

     

    경보병용 뒤는 11개 동·서 방향 통로가 갈라져 있는데, 38대의 전차와 보병이 서로 엇갈려서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갑옷을 입고 손에 긴 창, 칼, 활 등 병장기를 든 중보병이다. 전차와는 유기적으로 조합된 군진 주력으로 기세가 날카롭다.

     

    1호갱 남·북 양쪽 변두리에는 병사용이 1열로 서 있는데, 군진의 좌·우익에 해당한다. 적군의 '성동격서'(聲東擊西)를 방지하는 것이 주 임무다. 갱 내 뒤에 서있는 병사용은 군진의 후위이다. 부대 진군시 적이 배후에서 기습하는 것을 방어하여 후방의 근심을 제거한다.

     

      
    ▲ 1~3호갱 중 유일하게 발굴이 모두 완료된 3호갱. 3호갱은 군대 지휘부에 해당한다.
    ⓒ 모종혁
     병마용

     

      
    ▲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청동거마.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1/2로 축소하여 제작한 것이다.
    ⓒ 모종혁
     진시황

    지휘부인 3호갱, 병사부대인 1, 2호갱 뒤에 위치

     

    2호갱은 1호갱에서 동북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다. 길이 124m, 넓이 98m에 달한다. 기초 조사로 2호갱에는 전차에 메인 마용 350점, 기병용 마용 116점, 각종 병사용 900여 점 등 1400여 점의 병마용과 89대의 목제 전차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병·기병·전차가 혼합 편성한 군진인 셈이다.

     

    2호갱은 4개의 작은 진을 'ㅁ'자형으로 배치했다. 첫째 진은 곡형진의 선봉으로 330여 점의 궁수(弓手)로 구성됐다. 중앙의 160점은 중장비한 갑옷을 입은 병사용으로 8열 종대로 자리 잡았다. 둘레는 170여 점의 경무장한 입사(立射)용이 진을 에워쌓다.

     

    둘째 진은 곡형진 우측에 64대의 전차로 구성됐다. 전차마다 3명의 병사가 타고 있는데, 전차 앞뒤로 수행하는 보병이 없어 순수한 전차편대임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곡형진 중앙으로 전차, 보병, 기병으로 구성된 진이다.

     

    넷째 진은 곡형진 좌측에 위치한 기병대다. 108점의 기병을 위주로 하고 6대의 전차가 보조한다. 이들 기병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하며 가죽모자를 쓰고 발에는 가죽장화를 신었다. 한 손에는 활, 다른 한 손에는 고삐를 쥐어 날렵해 보인다.

     

    2호갱 내에서 발굴된 병사용과 마용, 병기 등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지휘부인 3호갱은 1, 2호갱 뒤편에 있다. 병사용 66점, 전차를 끄는 마마 4필, 목제 전차 1대가 출토됐다. 병사용은 손에 의장용 병기인 동수를 들고 얼굴을 마주한 채로 정렬하여 지휘관을 호위하는 모습이다. 3호갱이 '군막'(軍幕), 즉 사령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2호갱 앞에 있는 청동거마전시관에는 1978년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채색 동거마(銅車馬)와 병마용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청동거마는 모두 2대로, 진시황릉 서쪽의 한 부장갱에서 출토됐다. 발굴시 길이 7m, 넓이 2.3m의 대형 나무관 속에 놓여 있었다.

     

    청동거마 크기는 진짜 말과 수레의 1/2에 해당한다. 두 대의 청동거마는 모두 네 필의 구리 말에 매여 있지만 모습과 구조는 다르다. 차형이 크고 장식이 화려하며 모방도 정교해 중국 내에 발굴된 청동거마 중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 흡사 산과 같이 거대한 진시황릉. 진시황릉은 지금까지 도굴되지 않은 채 역사의 비밀은 간직하고 있다.
    ⓒ 모종혁
     진시황

     

      
    ▲ 진시황이 전국시대 제후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는 과정을 담은 부조도.
    ⓒ 모종혁
     진시황

    병마용에서 1.5㎞ 떨어진 진시황릉은 지난 2천여 년 동안 도굴꾼의 로망이었다. 진시황릉 발굴은 37년 동안 무려 70만 명이 동원된 대역사였다. 완공 당시 전체 부지는 50㎢, 봉분 높이는 120m에 달했다.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황제 능원이다.

     

    진시황릉 지하궁전에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든 금은보화와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수많은 도굴꾼들이 진시황릉의 보물을 노렸다. 하지만 지하궁전으로 이르는 길은 미로와 같고, 화살이 자동 발사되는 부비트랩이 있어 약탈을 피했다.

     

    지하궁전은 진시황이 생전 살았던 아방궁을 모방해 지어졌다. 지하궁전 내부는 천상과 지상 세계를 축소해서 만들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지하궁전이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묘사했다.

     

    진시황의 바람과 달리 통일제국 진은 기원전 206년 멸망했다. 그러나 진은 '중국'(China)이라는 이름과 병마용, 진시황릉을 남겼다. 진시황이 남긴 성과는 오늘날까지 불로장생하고 있는 셈이다.

     

    # 여행Tip

     

    병마용박물관은 시안시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병마용에 가려면 시안 기차역에서 병마용과 진시황릉으로 가는 전용 관광버스 306번을 타면 된다. 버스비는 7위안(한화 약 1200원)이고, 30분마다 출발한다. 좌석은 넓고 냉방도 잘되어 승차감이 좋다. 시안역에서 병마용까지는 약 50분이 소요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30~17:30, 겨울철 08:30~17:00이다. 입장료는 90위안(약 1만5300원)이다. 최근에는 병마용을 찾는 한국인이 늘고 있어 한국어가 가능한 가이드가 경내에 있다. 가이드비는 90위안이다.

     

    진시황릉은 병마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가다 내리면 된다. 병마용의 개방시간은 매일 8:30~17:30이다. 입장료는 50위안(약 8500원)이다. 여기는 한국어 가이드가 따로 없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10. 6. 11:08 시사/요즘 세상은
    [이사람] 끈질긴 생부의 노력이 만든 ‘기적’
    ‘입양 34년만에 부녀 상봉’ 배광옥·난희씨
    75년 아내 죽고 갓 태어난 딸 프랑스 보내
    홀트복지회에 새 주소 계속 남겨 ‘만남’
    “양부 돌아가셔 감사인사 못드린 게 한”
    한겨레  권오성 기자
    » 프랑스에 입양됐던 배난희(다프네 낭 르 세르장)씨가 34년 만인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 일시보호소에서 아버지 배광옥씨를 만나 손을 맞잡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친아버지는 딸의 양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등졌다는 이야기를 듣곤 터져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말했다. “나의 첫째 꿈은 능력이 닿는 데까지 너의 발전을 돕는 것이고 두번째가 너를 키워준 양부모를 만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돌아가셨다니… 한이 되겠구나.”

    갓 태어난 딸을 외국으로 입양시켜야 했던 배광옥(64)씨는 28일 딸 난희(34)씨를 34년 만에 만나 연신 울고 웃었다. 평생 프랑스에서 살아온 난희씨도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눈이 마주칠 때면 미소를 지었다.

    충남 광천에서 태어난 배씨는 1973년 홀로 상경해 이듬해 동대문구 면목동 판자촌에 아내 김순희씨와 보금자리를 틀었다. 겨울이면 윗목의 물그릇이 얼고 여름이면 뒷산 모기들과 싸워야 하는 산동네였지만 부부는 행복했고 아내는 곧 아이를 가졌다.

    75년 6월18일, 배씨는 진통이 시작된 아내를 업고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의사는 ‘임신중독’이라며 제왕절개 수술을 권했지만 돈이 없던 배씨는 동네 조산원에 도움을 청했다. 그날 밤 10시, 딸 난희씨를 낳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자살까지도 생각했던 배씨는 아이를 홀트아동복지회에 맡겼고 핏덩이 같은 딸을 프랑스로 보내야 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로를 찾은 혈육의 정은 ‘34년 만의 상봉’이라는 극적인 만남을 맺었다. 한강변 아파트에서 경비원 일을 하면서 아내를 따라 강물에 뛰어들고만 싶은 유혹과 싸워왔던 배씨는 20여년이 지나 재혼해 안정을 찾았고, 딸을 보내야 했던 홀트아동복지회를 다시 찾았다. 그는 혹시나 자신을 찾을지 모른다는 마음에 주소와 연락처를 남기고 변동이 있을 때면 늘 고쳐 두었다. 프랑스에서 사진작가로 성장한 딸은 전시회로 인연을 맺은 한국문화원의 후원으로 미뤄만 왔던 고국 방문의 기회를 잡아 최근 비로소 서울에 왔다. 이날 복지회의 주선으로 부녀는 극적인 재회를 했다.

    딸 배씨는 이날 “나의 빈 곳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늘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만나고 나니 이제 그만 찾아도 될 것 같아요.”

    부녀는 34년이라는 지난 세월을 따라잡기 위한 앞으로의 계획에 마음이 바쁘다. 배씨는 “나도 20년가량 여러 사진을 찍어왔는데 서울과 파리에서 너와 함께 사진전을 하고 싶다”고 들떴고, 딸은 “돌아가면 한글부터 배우고 싶다”며 웃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10. 6. 10:43 시사/요즘 세상은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9. 17. 18:01 시사/요즘 세상은
    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917083214&section=04

    며칠 전 나는 서울이 발신인 낯선 분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나에게 메일을 보낸 분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베광옥입니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문장으로 내용이 시작됐다.

    8월 25일 여기 프레시안에 칼럼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작가이자 이론가, 대학 강의와 전시기획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 국적의 한국인 '다프네 낭 르 세르장(Daphné Nan Le Sergent - 한국명, 배난희(裵蘭姬))에 대해서 글을 쓴바 있다.(관련 기사 : 정말 가난해서 저를 버렸나요?)

    지난 6월 프랑스 파리에서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부모를 찾아 34년 만에 한국행 비행기를 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했다 "서울을 가면 저를 낳아준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서울에 홀트아동복지회에 영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봤지만 아무런 답신이 없었어요."

    나는 어떤 확신도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성장이후 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정작 부모나 일가친족을 만나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얘기를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34년 만에 딸이 생부를 서울에서 곧 만나게 됐다. 그간 있었던 배난희의 이버지 '배광옥'(64) 씨가 그의 딸 배난희를 찾았던 노력들이 이제 드디어 결실을 이루었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프랑스 이름 '다프네', 원래 이름은 배난희인 그녀의 아버지 배광옥 씨는 나에게 보낸 이메일 편지에서 말하기를 "딸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겼는데,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바로 그랬다. 생부의 예상대로 이 노력이 주효했다.

    그리고 34년 전 그는 비록 딸아이를 해외에 입양 보낼 수밖에 없는 당시 처지였지만, 그는 딸과 헤어져 있는 긴 시간 동안 한시도 딸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배광옥 씨의 메일에 즉시 답을 하면서 딸과의 만남이전에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와 딸이 소통할 수 있도록 딸의 프랑스 이메일 주소를 먼저 알려주었다.

    ▲ ⓒ김상수
    그리고 나는 "난희 씨의 아버님께서 30년도 그 이전에, 어려운 사정에 처하여 아기를 해외로 입양시킬 수 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나마 주소와 전화번호를 홀트아동복지회에 꾸준히 남겨두신 일은 참으로 훌륭하신 판단이었습니다. 두 분의 만남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수많은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간답니다. 부모들이 아기를 복지회에 맡긴 이후에, 난희 씨의 아버님처럼 변경된 전화번호나 주소를 복지회에 계속해서 남기면 다행이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이런저런 사정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 두 사람의 만남은 아버님의 성실함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이는 귀감이 되고 남습니다. 아기를 복지회에 넘겼지만 주소나 연락처가 변경될 때마다 계속 복지회에 연락처와 기록을 남긴다면 오늘 같은 만남의 기적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답니다. 아버님이 보내주신 서신이 비록 개인적인 서신이지만 이 서신을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하여 수많은 비슷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고 메일을 보냈다.

    곧 난희의 아버지로부터 답이 왔다. "지금은 아련하기만 한 지나간 날들이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 시간이었던지 이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0년대 초반 업무 차 김포공항을 찾을 때마다 많은 아이들이 입양 차 떠나는 현장을 목격하며 나는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울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딸 난희가 훌륭한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그동안 난희에게 쏟아주신 관심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의 두서없는 글이 다른 입양인들에게도 귀감이 된다면 어디에 공개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우리의 난희를 계속 보살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배광옥 올림."

    나는 배광옥 씨의 정중한 개인 서신을 그 분의 허락을 받아 여기에 공개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해외 입양아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을 다시 찾아왔을 때, 배광옥씨처럼 연락처나 주소가 변경되어도 계속해서 자신의 처지를 아기를 넘긴 복지회 등에 기록으로 남겨, 언젠가는 반드시 귀중한 만남들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김 상 수 선생님

    나는 서울 성북구에 거주하고 있는 배광옥(64세)입니다

    나는 충청남도 광천에서 태어나 학업과 군복무를 마친 1973년 일자리를 찾아 단신 상경하여 지인의 도움으로 한강변에 위치한 아파트 건설현장경비원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74년에 김순희(金順姬)를 아내로 맞아 달동네인 동대문구 면목동의 단칸방에 행복한 가정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결혼 4년 전인 1970년에 맞나 그 동안 서로 인생의 반려자로 사귀었고 진정한 사랑을 토대로 맺어진 결혼생활은 비록 도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낮선 서울이었지만 우리들만의 천국에서 지내왔던 시간들은 지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윗목에 놓아둔 물그릇이 밤사이 얼음으로 변해있었고, 300m가 넘는 산 아래 미끄러운 비탈길까지 내려가 물을 길어오는 일, 언젠가 잠든 밤에 연탄가스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와 고생한 생각, 비만 오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하여 부엌의 그릇이 총동원되기도 하였고, 그릇에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우리의 사랑을 축복하는 화음소리로 들으며 밤을 새웠던 추억, 여름철 뒷산에서 내려오는 모기떼와의 싸움, 다닥다닥한 방문 앞의 고약한 화장실 냄새 등, 정말 열악하기만 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이 있었기에 어떤 불편함도 극복할 수 있었고, 그 보다 더한 어려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쉬는 날이면 근교 산에 올라 먼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기도 하였고, 가끔 동네 시장에 들려 아내가 좋아하던 순대, 떡볶이, 오뎅 등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밤이 되면 중랑천 뚝방에 앉아 물에 반사되는 불빛을 바라보며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같이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 속에서 아내는 어느덧 아이를 갖게 되었고, 사랑의 결실, 우리의 귀여운 아이가 태어나는 날 만을 고대하며 우리는 아기를 위하여 무었을 어떻게 해줄 것인가 하는 행복한 고민을 이야기하는 것도 우리 일과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6월 18일, 아침 무렵부터 아내의 출산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는 진찰결과 예상하지도 못했던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산모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심각한 이야기까지 해 주었습니다. 임신말기 다리가 조금씩 부어오르는 증세는 임산부 대부분에게 발생되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의사들은 산모가 출산차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많은 진료비를 받아내기 위하여 관행적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유도한다는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바 있는지라 의사의 수술권유에 대한 불신이 당시에는 매우 컸습니다.

    그리고 수술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금전적인 부담은 어리석은 판단으로 유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내도 수술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설마 아내에게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귀가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괜찮던 아내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지더니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웃 아주머니의 소개로 근처 조산원을 찾게 되었는데 담당 산파는 오전에 병원에서 상담했던 내용들과 현재 산모의 상태를 살펴본 후 그렇게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자기네 조산원에서 출산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또 조산원 2층에는 병원(산부인과)이 있어 만약 응급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신속히 대처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으로 조산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내는 시간이 지날수록 산고에 따른 신음의 간격도 빨라지고 또 그 소리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에 대하여 대신하거나 나눌 수 없는 나는 괴로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고 한없이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으로 현재의 심정이나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하였습니다. 아내의 진통은 한동안 이어지고 이러기를 세 시간 여, "앙!∼" 하는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드디어 새 생명이자 나의 유일한 혈육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이때 병실의 시계는 밤 1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땀에 흠뻑 젖어있는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출산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아이를 출산한 아내가 무척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보였고, 아무리 첫 아이라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 심한 고통이라면 첫 번째 아이로 만족하고 말겠다는 마음속의 다짐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출산직후 계속 이어져야 하는 후산이 진행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조산원의 담당산파는 산부인과 의사와 전화로 무엇인지 상의하고 아내는 즉시 2층의 산부인과 병실로 옮겨지게 되었고 몇 병으로 헤아려지는 수혈이 진행되고 후산과 관련된 의사의 조치가 가해지는 순간, 아내는 많은 양의 피를 하혈하게 되면서 얼굴은 차츰 백지장처럼 변하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의사는 자신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음을 판단했음인지 산모를 신속히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결정을 하고 아내를 도심의 병원으로 이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앰뷸런스를 불러 환자를 이송한다는 것은 아내의 현재 상태나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그래서 급한 대로 택시를 이용하기로 하였는데 자정이 넘은 시간(당시만 해도 자정에서 새벽4기까지 통행금지 제도가 있었음)에 택시잡기가 용이하지가 않았습니다.

    마침 일을 마치고 차고로 돌아가는 택시를 세워 정황을 설명하고 간곡히 부탁한 결과, 고마운 운전사는 흔쾌히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고, 택시안 내 가슴에 안겨있는 아내는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현재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어서 빨리 병원에 도착하여 무사하기만을 기원하고 있는 나의 심정과 아내의 위급함을 알았는지 운전기사는 나름대로 속력을 높여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져 나도 모르는 사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였습니다.

    산부인과를 출발하여 도심 병원의 응급실 병상에 도착하기까지 약40여분, 의사는 진단결과 이미 숨을 거둔지 10여분이 경과하였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이야기와 의료진 몇 사람이 달려들어 여러 차례 걸친 소생술을 시도하였으나 아내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하느님! 이 세상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어찌하여 저의 아내를"

    하늘이 무너지고 모든 세상이 뒤바뀌는 심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자동차에 뛰어들고 싶은 나의 충동을 알았는지 동행했던 산부인과 의사는 항상 나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랑하는 아내는 나의 곁을 떠났고, 아내의 시신은 화장 후 평소에 자주 찾았던 북한산 바위에 올라 하얗게 부서지는 아내를 바람 속으로 날려 보내며 이제는 고통과 시련이 없는 편안한 하늘나라에서 영면하기를 빌었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마친 후 깜깜한 방안에서 한없이 울고 있는 어린 핏덩어리를 안고 3일간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나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냈구나 하는 죄책감과 아내 없는 막막한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서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나도 아내 곁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옆에서 우는 아기에게 우유병을 물려주는 순간마다 비겁하기만 한 생각들에 채찍이 되어주곤 하였습니다.

    아기는 나의 유일한 혈육이자 아내가 떠나면서 나에게 남겨준 마지막 선물이다, 그리고 아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아기만이 아내를 대신하는 유일한 나의 가족이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의 아버지로써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이 아이를 부양해야 하나 하는 현실과 관련된 대책에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얻은 결론은 해외입양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발생된 고아나 미혼모 아이들의 해외입양을 주선하기 위하여 종교단체나 입양기관들의 성실한 노력으로 좋은 결실들을 보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해외입양에 대한 사회 인식도 비교적 좋은 편이었습니다.

    또한 한국 보다 훨씬 잘살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에 입양을 보낸다면 성장해 가는 아이의 앞날도 훨씬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아기를 멀고 먼 해외로 보낸 후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들을 떨쳐 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저 어린 핏덩어리를 어떻게 지금 보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입양의 실행에 있어 또 다른 문제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나 2년 이후로 입양을 미룬다면 그때 다시 입양 여부에 대하여 결정하여야 하는 새로운 괴로움이 따를 것이고, 이이를 키우는 동안 맺은 정을 떨쳐 버린다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입양을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경우가 올 수 있다는 생각과 무엇보다도 남자 혼자 생업에 종사하며 핏덩어리에 가까운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내가 처한 현실로 보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해외입양을 결정한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최종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의 해외입양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홀트아동복지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 아이의 이름은 배난희(裵蘭姬)-

    난초蘭- 계집姬-

    蘭 : 난초는 온갖 풍상과 역경 속에 피어나는 우리나라 전래의 꽃임과 동시 꽃이 고아하고 향기가 그윽한 절개의 상징으로 조상들로부터 사군자 중에 가장 사랑을 받은 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姬 : 엄마의 이름(金順姬)중 마지막 姬자를 붙여주어 엄마를 기리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뒷 글자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생년월일은 1975년 8월 18일- (홀트회에서 옮겨 적는 과정에서 6월 19일로 잘못 기재된 것으로 판단됨)

    기타 태어난 장소 등 아기에 대한 나머지 정보들을 홀트회에 제공한 것으로 생각나지만 정확하게 어떤 정보를 어떤 내용으로 제공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늙으신 홀어머님이 당신께서 직접 난희를 키우겠다고 하시며 해외 입양을 만류하셨지만 저는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난희를 떠나보냈고, 이후 난희의 해외 입양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것도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홀트회에 문의를 하게되면 전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냉랭하고 사무적인 메아리로만 되돌아 올 뿐 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난희의 해외입양 생활에서 혹시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낸 후 괴로운 심정으로 한 달 정도를 술로 살았습니다. 날이 새면 아내생각, 그리고 술이 깨면 난희 걱정,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자책의 괴로움을 이겨낼 수 없었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의 환영으로 잠을 이룰 수 가 없었습니다. 어쩌다가 꿈속에서 아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불러 댔고, 차츰 멀어 가는 아내를 따라가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폐인이 되어 가는 아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셨는지 늙으신 어머님께서 상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친구 몇 명이 우리 집에 찾아와 나와 생활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이성과 냉정을 되찾게 되었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나의 앞날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는 나를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새로운 아내를 맞이하여 재혼도 하였고 새로운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게 되었습니다.

    재혼 이후 열심히 노력한 20여 년,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찾게 되었고, 해외입양을 떠나보낸 난희의 소식이 궁금하고 걱정하는 정신적인 여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다시 찾은 홀트회는 모습이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우선 사무실의 규모도 그전에 비해 많이 축소된 것 같았고 담당직원은 종전과는 달리 나의 질문에 대하여 비교적 성실한 것 같았습니다. 확인된 것은 난희가 프랑스로 입양되었지만 나머지 사항들은 자신들로서도 알 수 없다는 답변과 프랑스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라는 단체가 있다는 사실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입양아의 현실과 난희나 양부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아무리 친부모라 해도 먼저 찾는다는 것은 아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충고도 해 주었습니다.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난희가 추후 한국을 방문하여 친부모를 찾을 경우에 대비하여 홀트회에 연락처를 남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후 입양아들이 대부분 여름철에 고국을 찾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의 주소나 전화번호가 바뀌게 되면 여름철 씨즌이 오기 전에 홀트회를 찾아 나의 정보를 변경하곤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는 아시는 신부님께서 프랑스에 방문할 일이 있으시다 하여 사정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마침 파리 시청에 아시는 분이 있어 프랑스 방문기간 동안에 한번 알아보겠다 하시어 난희의 인적사항과 입양아 모임인 "한국의 뿌리"회(당시회장, 미쉘 수스만스키)에 대한 알고 있는 정보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여러 가지 노력을 하셨지만 그러나 딸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어찌해야 난희를 볼 수 있을 것인가?

    ▲ ⓒ김상수
    그러던 2009년 9월 7일, 뜻 밖에도 홀트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난희가 지금 한국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아니면, 내게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난희가 한국에 와있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더구나 난희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내 일생 최대의 신선한 충격으로 자극되어 한없는 눈물이 나오기만 합니다.

    난희와 나는 9월 28일 홀트회의 주선으로 상면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난희는 그 때까지 한국을 여행한다는 것이고 누구의 안내로 어디를 다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난희가 한국에 와 있는 현실에도 지금은 아버지로써 딸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홀트회에 문의해 보아도 난희와 관련된 정보 등을 알려 줄 수가 없고 상면 시에 직접 확인하라는 답변뿐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이름까지도 말입니다.

    컴퓨터를 열심히 뒤졌습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 써신 프레시안에 칼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 있는 난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가슴이 벅차 있습니다. 그동안 꿈속에서나 상상했던 사랑하는 나의 딸 난희를 그려보며 직접 만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 동한 외로운 이국땅에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응어리진 것을 가슴에 앉고 있었을 난희의 원망스런 시선 앞에 나서서 용서를 빌기가 한없이 두렵기만 합니다.

    나는 이것을 감수함과 동시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 소통의 장벽 속에 난희를 떠나보낼 수뿐이 없었던 절박한 당시의 상황을 꼭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설사 난희를 맞나보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는 난희의 훌륭한 모습을 이미 사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난희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 했고,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언어의 장벽으로 모두 전달되지 못한다 해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몇 마디의 이야기로 전해줄 수 없었던 사연들은 진한 핏줄이 모든 것을 덮어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칼럼에 게재된 난희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눈매는 나를 닮은 것 같지만 입 주변의 모습들은 엄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생시에 좋아했던 진달래색 립스틱을 난희도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난희의 모습을 선생님이 쓴 칼럼 속에서 다운로드 하여 지금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 올려놓았습니다.

    난희를 떠나보내고 난 겨울 석유난로가 전복되는 주인집 화재사고로 가옥 전체가 소실되고 방안의 가재도구도 모두 불타 버렸습니다. 이때 나의 사진들도 함께 불타 버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는 언제든지 귀여운 난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난희 엄마의 생전모습을 직접 본 것 같아 무척 행복합니다.

    이제는 난희를 이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주시고 보살펴주신 프랑스에 계시는 양부모님을 찾아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대견스런 난희의 발전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선생님! 두서없는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배 광 옥 올립니다."

    오는 9월 28일, 34년간 그 기나긴 간난(艱難)의 세월을 지나 드디어 두 사람은 절절(切切)한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나는 이분들의 상봉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베를린에서

    김상수/ 작가

    (☞바로 가기 :
    필자 홈페이지)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7. 13. 12:26 시사/요즘 세상은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7. 4. 00:57 시사/요즘 세상은

    6월 30일 목동구장에서 만난 홍수아는 좋은 연기자이자 열혈 야구팬 이전에 건전한 시민이었다.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그러나 겸손하게 밝힐 줄 아는 그는 '진짜'였다(사진=박진환 작가)

    2005년 7월 8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두산과 삼성의 경기에 한 여성 연예인이 시구를 맡았다. 장내 아나운서는 그를 “홍수아”로 소개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19살 신인 여배우의 시구에 집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시구가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시구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명인사의 기념식으로 혹은 연예인들의 홍보 무대로 전락했던 시구(始球)가 홍수아의 등장과 함께 야구팬에게 색다른 재미와 화제를 선사하는 뉴스가 되고, 1회 이전의 ‘0’회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시구의 여왕’ 홍수아(23)를 스포츠춘추가 만났다. 단순한 연예인 시구자가 아니라 한국프로야구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중요 인물이라는 게 홍수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실제로 보니까 TV로 봤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정말요? (얼굴을 붉히며) 감사합니다. 칭찬해주시니까 기분이 좋은데요(웃음).

    오늘(6월 30일) 목동구장에서 벌어진 두산과 히어로즈의 경기는 동점과 역전이 숨 가쁘게 전개되는 접전이었습니다. 경기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솔직히 홍수아 씨가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경기를 관전해 무척 놀랐어요.

    (이상할 게 없다는 표정으로) 야구팬으로서 당연한 거 아니에요?

    시구를 마치고도 좀체 자리를 뜨지 않는 시구자라고 들었어요. 시구자 대부분이 짧으면 1회 길면 6회까지 관전하다가 자리를 뜨게 마련입니다. 평소에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관전하나요?

    당연하지요. 시구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야구보다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전 그냥 야구장에서 야구 보는 게 즐겁고 행복해요. (활짝 웃으며) 시구도 야구 보는 재미의 일부분일 뿐이에요. 오늘 연장까지 갔어도 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웃음).

    ‘굴욕포즈’에서 ‘개념 시구’로

    상투적인 질문부터 할게요. 야구는 언제부터 좋아했나요?

    아빠가 야구를 무척 좋아하세요. 덕분에 저도 초등학교 때부터 TV로 야구를 보면서 좋아하게 됐어요. 학교에서 발야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 규칙을 익혔고요. 그러다 시구하고 나서 야구에 ‘푹’ 빠졌지 뭐에요(웃음).

    첫 시구가 2005년 7월 8일 잠실 두산과 삼성전이었지요?

    네. 그즈음 두산에서 “(홍수아 씨) 시구를 부탁한다”는 연락이 소속사로 왔어요. 제 의사를 묻기에 두말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어요.

    시구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2005년 홍수아의 1차 시구 장면. 한국프로야구 시구는 홍수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사진=두산)

    과거 여성 연예인들의 시구를 보면 ‘투구’보단 ‘패션’과 ‘우아한 자세’에 더 신경을 쓴 게 사실이에요. 포수 미트까지 공을 던지면 혹여 “힘이 세다”는 말을 들을까 일부러 천천히 던진 여성 연예인 시구자도 있었다고 해요.

    야구 중계를 볼 때마다 다른 여성 연예인분들 시구하시는 걸 유심히 봤어요. 예쁜 차림으로 하이힐을 신고 시구하시는 분들이 뜻밖에 많더라고요. 하지만, 뭔가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 시구할 때 7부 바지에 운동화를 신었어요. 아마도 그것 때문에 야구팬들이 절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운동화는 저도 살짝 놀란 부분이에요. 더 정직하게 말하면 홍수아 씨가 야구를 존중하는 것 같아 무척 고마웠습니다.

    (잠시 생각하다가) 하이힐을 신고 마운드를 밟는 건 마운드에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투수에겐 마운드가 성전 같은 곳이잖아요. 사실 그때 스타일리스트분이 하이힐을 준비하셨었어요.

    복장도 복장이지만 그때 화제가 된 건 투구폼과 구속이었어요.

    시구하기 며칠 전부터 연습을 꾸준히 했어요. 매니저분과 캐치볼을 하면서 투구폼을 배우고 사무실 담벼락에 혼자 야구공을 던지면서 폼을 가다듬었어요. 시구 당일에도 구장 한편에서 열심히 공을 던지며 몸을 풀었어요. 덕분에 투구폼도 다른 시구자분들과 다르고 공도 빨리 던질 수 있었어요.

    시구에 특별히 신경 쓴 이유라도 있나요?

    전 한번 스케줄이 잡히면 그냥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거든요. ‘한번 할 때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자’ 이게 제 지론이에요(웃음).

    시구를 지켜본 대중의 반응은 놀라움 일색이었습니다. 다들 ‘아, 저런 시구도 있구나’ 했지요. 하지만, 지금 같은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어요.

    맞아요. 당시 대부분 기사의 제목이 ‘홍수아의 굴욕포즈’였어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도 여자인지라, 창피하기도 하고. ‘사진이 왜 이렇게 나왔을까’ 속이 상하기도 했어요.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 표정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표정이 환해지며)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분이 제 진심을 알아주셨어요. ‘얘는 최소한 운동화는 신을 줄 안다.’ ‘적어도 예쁜 척하고 시구하진 않는다.’ ‘홍수아는 뭐든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생각들을 하시게 됐나 봐요. 그때부터 절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눈에 띄게 늘었어요.

    홍수아는 곰처럼, 베어스처럼 묵묵히 제 갈길을 가는 연기자다(사진=박진환 작가)

    이후 시구에서도 표정은 항상 일그러져 있었어요. 사실 모든 투수가 투구할 땐 표정이 일그러진답니다.

    제 표정이 일그러지면 질수록 더 좋은 시구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혼잣말을 하듯) 표정이 일그러지건 그렇지 않건, 어차피 그 얼굴도 제 얼굴이에요. 전 제가 온 힘을 다할 때의 표정이 가장 좋아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홍수아 씨 시구가 야구계의 최대 화제로 떠올랐어요.

    그즈음 야구팬들이 제 시구 사진으로 패러디를 많이 하셨어요. '깜짝! 사상 최고 광속구 투수 탄생. 홍수아 시속 156km'이라는 패러디를 비롯해 정말 많은 패러디물이 나왔어요. 그때 처음으로 많은 야구팬이 절 ‘홍드로’라고 부르신다는 걸 알았어요.

    홍드로라, 저도 처음엔 뭔가 했어요.

    한번은 기사 댓글을 보는데 어느 분이 ‘홍드로, 홍드로’하고 쓰신 거예요. 속으로 ‘홍드로’가 뭐지 하고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미 메이저리그 투수 가운데 페드로 마르티네스란 분이 계시더라고요. (손뼉을 치며) 정말 위대한 투수시지 뭐에요. 알고 보니까 제 투구폼이 그분과 비슷하다고 그런 별명을 지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홍드로란 별명 어떠세요?

    정말 좋아요. 다른 분들도 ‘홍드로, 홍드로’하고 절 부르면 더 친근하게 느껴지시나 봐요. 간혹 누가 뒤에서 ‘홍드로’하고 불러주시면 울컥할 때도 있어요. 감사해서, 정말 감사해서(웃음).

    두산에게 ‘The End'는 없다

    두 번째 시구는 2007년 한화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7차전이었습니다.

    시구 제의가 왔을 때 ‘이번에도 온 힘을 다해 노력하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 두산 프런트 분께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서 그런데 글러브와 공을 좀 구할 수 있을까요”하고 부탁드렸어요. 그때부터 시간만 나면 학교 운동장이나 한강 둔치를 찾아 캐치볼을 했어요. 첫 번째 시구 때와는 달리 두산 상의 유니폼을 입기도 했지요.

    저만의 느낌일까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구는 감동의 농도가 달랐어요. 후자가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고나 할까요. 물론 정확한 이유는 대기 어렵지만.

    첫 번째 시구가 끝난 다음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 “굴욕포즈란 놀림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말을 했었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두 번째 시구에 나섰으니 그 프로그램을 봤던 분들이 ‘어, 상처받았다더니 또 시구하네’하고 놀라지 않으셨겠어요. (다부진 표정으로) 그분들께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때 받은 건 상처가 아니라 기쁨이었다는 걸. ‘쟤는 항상 열심히 한다’는 걸. 그래서 더 열심히 던졌고, 그걸 보고 감동을 하신 것 같아요.

    2007년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한결 성숙한 투구를 선보인 홍수아(사진=두산)

    세 번째 시구는 지난해 한국시리즈 5차전이었어요. 이번엔 유니폼 상·하의를 완벽하게 입고 나왔어요.

    그 경기로 한국시리즈가 끝났으니 제가 한국시리즈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봐도 되겠지요(웃음) 두산이 그때 우승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올 시즌 두산은 어떤가요?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능할 것 같은가요?

    네, 꼭 우승할 거예요. 두산 경기는 정말 9회 말까지 봐야 해요. 팀 대부분이 경기 초반 점수 차가 많이 나면 포기하고 말잖아요. 하지만, 두산은 달라요. 9명의 선수가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플레이에 ‘The End'는 없다니까요(웃음).

    두산 선수 가운데 특별히 친한 선수라도 있나요.

    그렇게 친한 선수는 없어요. 임태훈, 김현수 선수 정도. 지금은 롯데에서 뛰시는 홍성흔 선수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그분이 저와 성도 같고 시구할 때마다 공을 받아주셨거든요.

    그런데 스캔들은 엉뚱하게 고영민과 났어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출전하셨던 국가대표 선수단이 인천공항으로 귀국했을 때에요. 그때 환영 꽃다발을 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입국장 게이트가 열리고 고영민 선수가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꽃다발을 드린 것뿐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LG 봉중근 선수가 가장 먼저 나오셨다고 해요. 그때 인기도 봉중근 선수가 무척 좋았고요. 주변 분들이 보시기에 봉중근 선수한테 꽃다발을 주지 않고 고영민 선수에게 준 게 이상하셨나 봐요.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났던 것 같아요(웃음).

    유독 두산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시구 전에도 두산에 호감이 있었어요. 시구 뒤에 정말 좋아졌죠. 지금은 비록 명예선수지만, 제 구단이란 생각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한번은 어떤 방송사에서 제게 인터뷰를 요청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말씀 드렸는지 아세요.

    ?

    ‘구단의 허락이 있어야 인터뷰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지 뭐에요(웃음). 그렇다고 제가 두산만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8개 구단 모든 팀을 응원하고 좋아해요. 그 가운데 두산을 조금 더 좋아할 뿐이랍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두산 유니폼을 맞춰 입고 시구에 임한 홍수아(사진=두산)

    '진짜 연기자' 홍수아

    주목받는 젊은 연기자이자 야구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명예투수예요. 야구와 연기의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제겐 연기와 야구가 똑같은 존재에요. 제가 무척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대상이자 정말 열심히 하고 싶은 분야에요. 좋은 연기자가 되려면 아직 올라가야 할 계단이 많다는 걸 잘 알아요. 연기자로서의 홍수아는 부족한 것투성이에요. 하지만, 급하게 오르지 않으려고 해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스윙연습을 해 마침내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된 김현수 선수처럼 저도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려고 해요.

    명예투수 홍수아의 장점은 잘 알고 있어요. 빼어난 투구폼과 입이 쫙 벌어질 만큼의 위력적인 공을 던지는 투수지요. 이번엔 연기자 홍수아의 장점을 듣고 싶은데요.

    글쎄요. (쑥스러워하며) 제 입으로 말하는 게…좀….

    자신의 장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서 남의 인생을 표현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요. 한 작가가 그러더군요. “홍수아의 연기는 진짜”라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제 연기의 장점은…진심으로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진심으로 한다’는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요.

    가슴으로 연기한다는 거죠.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는데요. 지난해 주말드라마 ‘내 사랑 금지옥엽’에 한창 출연하고 있을 때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시구를 했어요. 그런데 시구를 마치고 무슨 용기가 났는지 관중석을 향해 연방 손 키스를 날렸지 뭐에요. 제 스스로 손 키스를 날리고 나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때 ‘내 사랑 금지옥엽’의 배역이 철없고 명랑한 역할의 ‘백재라’였거든요.

    백재라?

    경기가 끝나고 집에서 시구 동영상을 다시 보는데 손 키스를 날리는 행동은 드라마에서 ‘백재라’가 보이던 행동이었어요. 그러니까 손 키스를 날린 건 ‘홍드로’가 아니라 ‘백재라’였던 거예요(웃음). 평소 연기에 몰입하면 그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역할에서 헤어나지 못하곤 해요. 예전 ‘하늘만큼 땅만큼’이란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 배역이 유년 시절 왕따 당한 경험이 있는, 슬픔이 많은 아이였어요. 그 작품 끝나고 우울증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다른 연기자보다 제가 더 배역에 몰입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아요.

    여담이에요. 일전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드라마로 제작돼 화제가 된 바 있어요. ‘야구’하면 떠오르는 여성 연예인이 홍수아 씨인데요. 이름이 없더군요. 저는 당연히 캐스팅이 될 줄 알았거든요.

    (겸손한 목소리로) 절 모르는 분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천만에요.

    그럼 다행이에요. 요즘 야구영화를 많이 제작하시나 봐요. 영화 관계자분들이 절 보면 꼭 그러세요. “홍수아 씨가 캐스팅 1순위입니다”라고. ‘홍드로’를 예쁘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구속과 제구를 동시에 갖춘 '시구의 여왕' 홍드로

    재능있는 연기자 홍수아는 진심을 다한 연기로 정평이 나 있다(사진=KBS)

    ‘홍드로’가 연기자 홍수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양할 듯해요. 한 손이 다른 손을 씻어주듯 ‘윈-윈’효과만 내는 건 아닐 듯싶어요.

    저를 연기자가 아니라 야구로 먼저 아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한번은 사인해 드리고 있는데 팬분께서 “홍수아 씨, 공 정말 잘 던지세요. 진짜 홍드로 최고예요”하시는 거예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고 감사한 거 있죠. 그런데 그분이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는지 아세요.

    혹시

    (눈치를 챈 듯) 맞아요. “그런데 드라마는 안 하세요?”하시지 뭐에요. 그때 한창 드라마하고 있을 때였거든요.

    실망이 컸겠어요.

    전혀요. 되레 속으로 ‘아, 내가 연기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홍드로란 별명이 기쁠 때는 언제에요?

    잠실구장에서 유니폼 뒤에 ‘홍드로’란 이름을 붙이고 다니시는 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제 등번호인 1번도 적혀 있더라고요. 그땐 정말 눈물이 나는 줄 알았어요. 고맙고 감사해서요.

    등번호가 어째서 1번이에요?

    원래는 이재우 선수 등번호에요. 제가 두산 명예선발 투수 1호라고 구단에서 ‘1’번을 달아주신 것 같아요. 처음엔 ‘내가 명예선발 1호면 나중에 2호, 3호가 생기겠네’ 했거든요. 그런데 구단에서 “2호는 안 뽑는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요즘도 투구 연습은 꾸준히 한다고 들었어요.

    차에 글러브와 공이 있어요. 보여 드릴까요? 지금도 촬영하기 전 시간만 있으면 캐치볼 해요. ‘내 사랑 금지옥엽’ 촬영할 때는 김성수 오빠랑 캐치볼 하기도 했어요.

    연예인 야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법도 한데요.

    연예인 야구단 여기저기서 서로 오라고 하시죠. “유니폼 다 만들어놨으니 몸만 오라”고 하시는 곳도 있고요(웃음). 하지만, 제 구단은 오직 하나. 두산뿐이랍니다. 두산에서 이적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다른 팀에서 뛸 생각이 없어요(웃음).

    혹시 구속을 재본 적이 있으세요? 들리는 말에는 웬만한 사회인야구 투수보다 빠르다고 하던데.

    평균구속이 시속 80km 정도에요. 요즘은 조금 더 나올 것 같고요.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구속이 아니라 제구랍니다. 예전보다 제구가 많이 좋아졌어요.

    제구라.

    요즘 시구 기사 보면 ‘홍드로의 아성을 깨고 싶다’는 시구자분들의 다짐이 많은데요. 전 그분들 시구가 끝나면 어떻게든 인터넷 검색을 해서 다 보거든요. 보면.

    보면?

    원바운드로 던지면서 제 아성을 깨시겠다니(웃음). 농담이고요. 사실 저 혼자만의 ‘홍드로’가 아니에요. 저를 예쁘게 포장해주시고 다듬어주신 두산 프런트 분들의 힘이 지금의 ‘홍드로’를 만들었다는 생각이에요. 늘 고마운 마음이에요.

    홍수아의 꿈, "1이닝이라도 던지고 싶다."

    23살의 젊은 여성 홍수아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연기와 인생을 한 단계 성숙시키고자 한다. 인터뷰 내내 몰려드는 팬들의 사인 요구에 싫은 기색없이 환한 미소로 응대한 그는 '시구의 여왕' 이전에 '진정한 프로'이자 '선량한 이'였다. 그것이 우리가 홍수아를 '진짜'라고 부르는 이유다(사진=박진환 작가)

    당신의 꿈을 듣고 싶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언젠간 꼭 좋은 역할을 맡고 싶어요.

    좋은 역할은 어떤 역할인가요?

    주연과 조연을 떠나 극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전체적은 극의 흐름을 이끄는 역할이 아닐까요. 악역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정말 꿈은….

    연기대상이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싶은 건가요?

    아니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자신감이 넘친 말투로) 시구 말고 등판을 하고 싶어요.

    등판?

    실제 경기에 등판해보고 싶어요. ‘딱’ 1이닝만 던졌으면 좋겠어요. (간절한 표정으로) 정말 잘 막을 수 있는데.

    당신이 좋은 투수인 건 알아요. 하지만.

    (말을 막으며) 이래도 저요. 포크볼, 스플리터, 슬라이더, 투심패스트볼 등 못 던지는 공이 없어요. 일본에선 너클볼 던지는 여자선수가 프로야구에 입단했다고 하던데요. 아, 정말 부러운 거 있죠. 참!

    네?

    이것만은 꼭 밝혀둘 게 있어요.

    무슨?

    제가 돈을 벌거나 절 홍보하려고 시구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시구한다고 돈 받는 건 전혀 없어요. 응원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좋아하는 야구라, 구장을 찾는 것뿐이에요. 오해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분들께서 제 진심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진정을 거의 모든 이가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요.

    전 아직 어려서 경험해야 할 게 정말 많아요.

    야구나 인생이나 와인과 다를 게 없어요.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일수록 성숙해지게 마련이거든요. 가장 경험하고 싶은 게 무엇인가요.

    음, 연애에요. 사랑하는 이와 밥을 먹고, 길을 걷고, 대화를 나눠야 그 감정이 연기에서도 자연스럽게 표출되거든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데뷔해서 그런지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했어요. 더욱 성숙한 연기를 위해서, 제 인생의 성장을 위해서 지금이야말로 연애할 시간이 아닌가 싶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솔로는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도 그럴 게 솔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이나 생일 때 케이크가 팔리지 않거든요. 특히나 생일에 혼자 있다거나 일로 밤을 지새운다면 그것보다 불행한 시간도 없다는 생각이에요.

    저…실은 오늘이 생일이에요.

    네? 정말이세요?

    6월 30일. 오늘이에요.

    아니 그럼 생일에 야구 경기보고 지금 인터뷰하시는 거예요?

    생일엔 원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아닌가요(웃음). 오늘 두산이 이겼잖아요. 그것보다 큰 선물이 있나요. 그리고 인터뷰 약속이 생일 파티 약속 이전에 잡혔던 거라, 깨고 싶지 않았어요. 야구 좋아하는 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거…행복하지 않나요. 안 그래요?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6. 29. 18:04 시사/요즘 세상은
    역시 대륙의 저력은 대단하다..

    짝퉁이란 짝퉁은 다 만들어내는 것이지..

    마티즈, 애니콜 등등 유수의 제품을 카피하더니 이젠 피겨여왕 연아까지 카피하는구나..

    짝퉁이 생긴다는 것은 인기가 많다는 것이겠지..

    그 인기에 편승해서 뭔가 콩고물이라도 주워먹을려고....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9. 6. 29. 17:32 시사/요즘 세상은

    `시내 주행과 비슷한 경제모드(Eco-Mode)로 운전해보니 연비는 23~29㎞/ℓ.`일본 도요타가 야심차게 내놓은 하이브리드카인 `제3세대 프리우스(Prius)`를 직접 시승한 결과다. 배기량(1800㏄)이 비슷한 아반떼ㆍ포르테의 공인 연비(15㎞/ℓ)보다 1.5~2배 높은 수준이다. 프리우스는 세계 최초로 지난 1997년 시판됐고, 지난해 말까지 180만대가 팔린 최다 판매 하이브리드카다.

    이번 시승은 지난 24일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도카키 주행시험장에서 한국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기자단 3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관심은 역시 연비에 모아졌다.

    도요타가 발표한 3세대 프리우스의 공식 연비는 일본 기준인 10ㆍ15모드의 경우 38㎞/ℓ이며, 실제 주행을 가미한 또 다른 기준인 JS08로는 32㎞/ℓ이다. 하지만 일본이 발표한 연비 기준은 한국 미국 등 외국보다 높게 나온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날 시승 형태는 △시내 주행과 비슷한 경제모드 △전기모터로만 움직이는 EV모드 △급발진ㆍ급제동을 반복하는 모드 등 3개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제모드의 경우 3.4㎞ 트랙을 한 바퀴 돌고 1분간 멈춘 뒤 다시 주행하는 방식으로 모두 3바퀴(10.2㎞)를 돌았다. 3개 팀이 시승한 결과 연비는 23.9㎞/ℓ, 26.9㎞/ℓ, 29.3㎞/ℓ가 나왔다. 평균 운행속도는 시속 30~35㎞.

    반면 같은 구간을 급발진ㆍ급제동을 해가며 다소 과격하게 운전한 결과 연비는 절반 수준인 13~15㎞/ℓ로 크게 떨어졌다. 도요타 관계자는 "도쿄 도심을 출퇴근해보니 평균 연비는 22~23㎞/ℓ로 나왔다"고 설명했다.

    도요타는 3세대 프리우스의 경우 기존 2세대보다 연비가 10% 높아졌으며, 배기량을 1.5ℓ에서 1.8ℓ로 늘리면서 성능은 20% 향상됐다고 밝혔다. 다만 실제 70~80㎞ 구간에서 액셀러레이터을 밟으면 소음이 커졌고, 가속성능이 디젤엔진보다는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의 겉모습은 헤드램프ㆍ범퍼ㆍ측면 등을 날카롭게 처리해 2세대보다 젊고 다이내믹한 분위기를 가미했다. 반면 차값은 205만~327만엔으로 최저가격 모델의 경우 2세대보다 10% 이상 낮아지면서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3세대 프리우스는 일본에서 시판된 지 한 달 만에 18만대가 계약됐다. 예상보다 수요가 폭증하면서 출고까지는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도요타는 이번 프리우스를 연간 30만~40만대 생산해 80여 나라에 수출할 계획이다.

    도요타는 오는 10월 3세대 프리우스를 비롯해 베스트셀러카인 중형차 캠리와 캠리 하이브리드, 컴팩트 SUV인 라브4 등 4종을 동시에 내놓을 계획이다. 도요타는 한국에 3세대 모델 중 중간 가격대(250만엔)를 투입하고, 하이브리드용 배터리 등 핵심부품에 대해 종전과 비슷한 5년간 품질보증을 해줄 방침이다.

    ■ 오쓰카 수석엔지니어 "기술 현대차보다 5년 앞서"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카 개발을 총괄하는 오쓰카 수석엔지니어는 "하이브리드 분야에서 현대차 등 다른 외국업체와의 기술격차는 5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도요타는 시판 이후 12년간 축적된 기술을 보유하고 수많은 고객들의 요구사항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요타는 이번 3세대 모델의 경우 600~700개에 달하는 하이브리드 기술특허를 신청한 상태다. 이 때문에 `하이브리드 기술개발은 일본 도요타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고는 어려운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는 "미래차의 핵심기술은 하이브리드"라며 "앞으로 특허권을 침해하는 사례에 대해 적극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도요타는 올 연말께 4세대 프리우스 개발에 착수할 예정이다. 오쓰카 수석엔지니어는 "3세대 하이브리드 기술은 이제 성숙단계에 접어들었다"면서 "4세대 모델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란 기존 하이브리드카에 비해 기름보다는 배터리에 더 많이 의존하며, 특히 가정용 전기로 배터리를 충전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는 "지금 공급을 늘리지 못하는 것은 배터리 생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하이브리드 기술은 배터리 기술 향상에 집중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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