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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느낌/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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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

    '일상/교회'에 해당되는 글 4

    1. 2008.11.03 오프닝 동영상
    2. 2008.10.16 아히둡
    3. 2008.06.30 [스크랩]안식일?? 주일??
    4. 2008.06.14 침례교의 교리
    2008. 11. 3. 10:33 일상/교회
    아내는 성균관대 기독학생회 겟세마네 동문회에서 일한다..

    재택을 할 수 있는 일이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일하고 있다..(애들 둘 데리고 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 겟세마네에서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인 홈커밍데이를 지난 토요일에 치뤘다..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하였지만 큰 행사를 잘 치뤄낸 아내가 대견스럽다..


    난 이번 프로젝트의 막바지라 그날 출근을 했다..

    겟세마네 홈피에서 동영상을 하나 봤다..

    아내의 동기이자 아끼는 동생인 호영이가 편집한 영상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스크랩을 해본다..

    저런 아이디어를 내다니 대단한 재치꾼임이 틀림없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8. 10. 16. 10:15 일상/교회
    계속 야근에, 밤샘에....

    지쳐있던 차에 오늘은 늦잠을 잤다..

    아침에 깨었는데 이상하게 '아히둡'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맴돈다..

    요며칠 전철에서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을 읽고 역대하를 읽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거기에서 나온 이름인 것 같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찾아봤다..

    중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단지 누구누구의 몇대 조상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는 걸 보니...

    그런데 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냥 생각났나보다...



    오늘도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야겠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8. 6. 30. 17:55 일상/교회
    출처 : http://blog.naver.com/jjkkhh2232?Redirect=Log&logNo=50004370920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롬 14:1, 10).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이런 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6-17)

    필자는 이미 주5일근무제논쟁을 통하여 새로운 안식일-주일논쟁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이번 대구에서 발생한 안식일과 십일조와 관련된 목사제명문제가 오히려 한국교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각한 안식일논쟁은 예수 당시(예, 마 12:1-14; 눅 13:10-17; 14:1-6; 요 5:1-18)와 초대교회(예, 골 2:16-17; cf. 롬 14:5-8; 히 4:1-11)에서도 있었지만, 교회사적으로도 안식일 논쟁은 그 역사가 깊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우리가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신약내에서의 일요일(혹은 주의 날)과 안식일과의 관계성을 살펴볼 뿐만 아니라, 교회사적인 이해와 발전도 살펴보아야 한다.

    다음의 구분은 Carson(1999:14ff.)의 것을 따랐다.

    1) 전통적인 청교도적 안식일-주일엄수주의: W. Rordorf-J. Franke-R. T. Beckwith & W. Stott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안식일인 토요일이 일요일인 주일-안식일로 전이되었다고 주장한다.

    2) 수정된 청교도적 안식일-주일엄수주의: P. K. Jewitt가 대표적인 인물로 전이의 개념보다는 초대교회의 일부 일요일준수의 관습에 근거하여 주장하였다.

    3) 제7일안식교의 안식일-토요일엄수주의: S. Bacchiocchi가 안식교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요일예배는 초대교회의 산물이 아니며, 태양숭배의 제의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반(反)안식일 엄수주의:D. A. Carson(p. 16)등이 주장한 것으로, 세부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진다:

    ① 신약에서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환신학(\'transfer\' theology)을 발전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② 안식일준수가 창조시부터의 원리로 보기는 어렵다.
    ③ 신약의 저자들이 의식법과 윤리법으로 구분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④ 주일의 준수는 2세기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⑤ 일요예배가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아니다.

    1. 구약에서의 안식과 관련된 제도와 절기들

    구약에 안식일 개념이 한가지로 유지되어 왔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약 속에서도 안식일의 개념은 변천되었으며 구약의 안식일 개념은 다양한 하부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는 개략적으로 그 의미와 하부요소들을 나열하고 그 신학적 의미와 내용을 정리하는데 그칠 것이다.

    1.1. 하나님의 창조와 연관된 안식일 규정(창 2:1-3; 출 20:11; 31:17)

    안식(싸바쓰)의 개념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안식일준수라는 개념이 창조원리에서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법제화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창세기 본문은 창조사역완성과 갱신의 의미의 안식이 나타날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란 단순히 일의 정지나 사역의 그침의 의미보다는 기존의 일의 마무리(終結)와 새로운 일을 위한 원기회복(refreshment)을 의미할 뿐이다. 또한 낮과 밤이 반복되는 6일의 순환과는 다른 시작과 끝이 없는 7일째의 안식은 그 개념이 쉽게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확대(擴大)되기도 한다. 7일째날을 복주시고 거룩케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의 일환이었다는 점도 말해준다. 다시 말하자면, 7일과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선언과 행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의 안식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안식일규정으로서의 법제화는 창세기보다는 출 20:11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안식일은 언약의 표이며 언약준수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출 31:12-17; 겔 20:10-26; 22:8; 26; 23:28).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노동이 인간의 노동과 대조되어 인간의 측면에서의 노동과 쉼의 개념과 대조되어 입법화되었다. 중요한 점은 특히 출 34:21; 23:12에서는, 모든 노동하는 존재들(주인과 가족과 종과 동물들까지도)에 대한 배려가 나타난다. 이러한 개념들은 안식년에서 발견되는 가난한 자들과 땅과 들짐승에 대한 배려까지도 포함된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안식일의 거룩성은 무차별적으로 노동에서의 쉼(즉 창조의 원리의 회복)을 상기하는 것이고 준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애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창조원리의 적용과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과 정의의 집행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안식에 대한 거부는 단순히 날짜를 지킴으로서 얻는 종교적 만족감이나 탁월성의 보상이라기보다는 창조섭리에 대한 거부로 여겨져서 사형이 집행되었다(출 31:12-17). 추가적으로 신 5:12-15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새창조적인 개념에서의 안식의 개념과 노예의 중한 짐으로부터의 놓임을 기념하는 날로서의 휴식이 강조되었다.

    1.1.2. 제의적 규정들(레 23:3; 민 28:9-10; cf. 레 24:5-9)과 세부적인 금기사항들(출 16:22-30; 35:3; 민 15:32-36)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 혹은 구속사적 업적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는 일들에 대한 규정도 있으며 부정적으로는 하나님이 안식(일)의 주관자시며 그 안식의 거룩성이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언약의 당사자인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법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안식일준수의 거부는 언약파기에 따르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와 새 이스라엘백성이 맺은 언약의 조건이 안식일준수였는가, 즉 안식일준수가 그리스도의 언약의 표였는가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1.1.3. 선지서에 나타난 안식일준수의 특징들(사 1:13; cf. 호 2:13; 사 66:23; 겔 45:16-17; 46:1-12)

    마찬가지로 그러한 안식의 본뜻과 그에 대한 제의적 규정들과 세부적인 금기사항에 대한 일종의 적용으로서 선지서는 안식일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제의와 삶과 무관한 성일(聖日)과 절기와 희생제물과 안식일의 준수는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호 2;13; 사 66:23; 사 1:13; 호 2:13; 암 8:5; cf. 사 56:18). 또한 안식일의 위반이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인 것처럼 여겨진다. 안식일이 언약준수의 표일 수는 있지만, 안식일 준수가 곧 언약 그 자체는 아니다.

    정리컨대, 구약에서의 안식일준수의 개념은 인류애와 신학적인 내용적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언약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단순한 쉼의 문제뿐만 아니라, 야웨에 대한 경배와 찬양적 요소들도 포함하였다. 구약에서도 안식일에서 일을 해야 할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일상적인 노동행위는 중지해야 했다. 그날에 감사와 찬송과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선포와 노래로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였던 것 같다(시 92편). 그러나 이러한 안식일의 예배와 찬양적 목적은 일주일 전반에서의 표면적인 의무를 축소하거나 대체하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와 종말론적 안식일

    신구약중간시대와 예수시대의 유대교의 안식일은 수많은 규정들의 확대와 문자적 준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성은 지극히 세밀한 결의론적 조항들의 산출과 안식일위반에 대한 관대한 이해의 발전, 그리고 언약적 의미와 축제적 성격의 강조가 결여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과 구약적 배경 속에서 복음서에서는 안식일의 주관자이시며 안식을 이루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등장한다.

    이것은 전혀 새롭거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이나 이해가 아니었다. 소위 율법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과의 갈등도 선별적 문자주의 혹은 규례주의자들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였다는 점도 상기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의 관심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였다면, 예수의 관심은 왜 안식일을 지키는가? 였다. 일견 예수의 안식일의 완성은 인류애적인-정의적인 개념보다는 안식일의 주관자로서 종말론적인 완성의 측면에 더 강조점이 있었던 것 같다.

    예수는 습관대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가르치셨고 실제의 사역(귀신의 축출과 다양한 치유사역들, 이삭을 베어먹을 때의 교훈, 안식일 회당에서의 희년복음의 선포 등)을 통하여 안식일의 참 의미를 청중들에게 전하려고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안식일에서도 일한다고 말한다. 이는 전혀 모순되는 행동이 아니다.

    바울에게서 안식일-주일관은 크게 부각되지 않지만, 그에게 있어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랐으며 성령의 법에 의존하였다. 단언할 때, 날을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으로 신앙의 척도로 판단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점이다. 이것은 자유의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말론적 안식관은 히브리서에서 더 현저하게 발견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안식의 성취와 현재적 안식화(安息化), 그리고 미래적 안식의 약속으로 구분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식은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함으로 현재적으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며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창조시에서 제시되었던 종말론적 안식(eschatological rest)은 완성될 것이다.

    2.1 신구약에서의 '주의 날'의 개념

    구약에서 '주의 날'은 주로 종말론적인 측면에서 심판과 징벌의 날을 의미하였다. 신약에서는 안식후 첫날이라는 표현으로도 사용되기도 했지만,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계1:10에서 단 한 번 사용된다. 우리는 지나치게 불완전한 증거들을 갖고 신약본문들내에서 전이신학이나 토요일-안식일준수관(제7일안식교도들은 이점을 주장한다)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속사도시대 때 등장하는 문헌들에서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의 날이 매주 행해지는 특정한 예배의 날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특정한 예배의 날(일요일)의 기원이 신약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일요일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역사적 확증과 신념은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안식후 첫 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점만으로 기독교의 일요예배의 기원을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예배와 모임의 측면에서의 초대기독교인들의 집회는 적어도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안식일모임과 기독교인들의 가정모임이 병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계시록에서의 주의 날이 일요일이라는 특정한 날일 수는 있으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날과의 연관성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예배모임을 규정짓는 것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주권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가 '주의 날'로만 축소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또한 고린도전서(고전 16:2)에 나오는 일주일의 첫날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인들의 집회날이거나 예배중에 헌금을 내라는 증거본문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소위 일요일에 받았던 요한의 묵시였을 지라도,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교회관과 예배개념은 우리의 주일예배의 그것과는 스케일의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대로, 초대교회공동체 내에서 유대인의 안식일과 기독교인의 주의 날에 대한 대조적인 이해가 태동하였다고 볼 수는 있지만, 신약의 신앙공동체가 주의 날이 안식일을 대체하거나 계승하는 날로 보았다는 확고한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안식일의 연장이라는 개념도 찾을 수 없다.

    3. 신약시대 이후의 안식일-주일 논쟁

    속사도시대(주후 120-400년경)-- 얼마 남아있지 않는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유대인의 안식일준수와 기독교인의 주일에 대한 차별적 추구는 점차로 명확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과 단절>의 의식은 후대에 가서 <차별과 연속>의 의식으로 변천하였던 것 같다. 속사도들은 주일과 안식일을 예배의 날로서 연관시켰으나, 쉬는 날(안식일)로서는 연관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쉬는 날로서의 일요일은 콘스탄틴대제의 칙령에 의해서(321년) 행해졌다.

    초창기에는 (이그나티우스의 경우에) 안식일적 개념은 극명하게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신약시대에 나타나는 율법주의적 경향이 속사도시대 때 더 극심해졌기 때문에 사용되었던 극약처방일 수도 있다. 안식일준수가 정죄되었고 주의 날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조는 후대에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이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도 부인될 수 없다. 바나바의 경우는 상당히 알레고리적으로 구약을 이해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미래적인 성취로 이해하였다. 그는 일요일을 축하의식과 부활승천을 기념하는 날로 보았다. 디다케는 주의 날에 거룩한 식사를 하고 죄를 고백하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디오그네투스 서신에서도 유대교의 안식일준수에 대한 반대의 논증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추가로 일요모임 혹은 예배에 대한 증거들은 산발적인데, 다음과 같다. 소아시아 버두니아 지방총독을 지낸 플리니는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109년)에서 황제의 칙령을 따라 모든 일요일의 저녁집회를 금지하자, 기독교인들이 저녁식사시간에 모이는 것을 그만 두었다고 보고한다. 이후로 비두니아 지방의 일요일 저녁집회는 사라지고 나중에 제국 전체로 확대된 것 같고 결과적으로 일요일 아침예배로 이전되었다고 본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지정된 날 동트기 전에 미리 모여 모임의 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저스틴(Justin) 역시 자신의 변증서에서 일요일 아침에 예배를 보았다고 명시하였다.

    중세-- 명확한 의미에서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이신학(轉移神學)은 330년이후 유세비우스의 시편 91편주석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에게도 그 전이는 예배적 측면이었지, 안식의 측면은 아니었다. 심지어 6세기까지 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는 교회법적 시도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일요일적 안식일엄수주의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74)에게서 나온다. 그는 스콜라철학적 자연법이론에 근거하여 십계명은 자연법이므로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의식법적인 측면(7일)은 폐지되었으나, 도덕적 측면(노동의 금지)은 유효하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시대--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스콜라철학적 안식일엄수주의를 강력히 공격하거나 포기하였다. 예를 들어서 장 칼뱅(기독교강요 2.8.28-34)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되었으며 폐지되었고 일요일예배의식은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지만, 일요일의 휴식은 예배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고 일요일-안식일준수라는 교회규정을 고수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들보다 세배나 더 유치하고 육욕적인 안식일 엄수주의적 미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2.8.34).

    종교개혁이후시대--불행하게도 17세기 이후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안식일엄수주의로 회귀하였고 한국장로교신앙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소요리문답, 예배모범 등)에는 전형적인 그러나 더 심한 청교도적 안식일엄수주의가 내포되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청교도적 안식일주의외에도 이와 유사한 운동들은 제7일안식일침례교나 제7일안식일재림교에 의해서 날짜가 변경된 채로 유사하게 주장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개괄적인 연구를 통하여, 구약적 안식일과 유대교적 안식일, 기독교적 안식일간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러한 기독교안식일의 개념은 오히려 유대주의적-스콜라철학적 안식일엄수주의-청교도적 안식일엄수주의일뿐 성경적인 안식사상이나 바울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이나 심지어 요한 칼빈의 안식일준수에 대한 이해와도 상응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4. 결론

    개인적으로 필자는 본 논문을 정리하면서 더 확고한 안식일-주일관을 나름대로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Carson의 견해들을 따르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동의는 건전한 안식관에 대한 공유와 실천적 대안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 상황 속에서 몇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측면에서 모든 대화나 화해는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내에서 이러한 세부적인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동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의 동질성과 형제애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2)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발생하는 교회 내에서의 정죄와 갈등과 분열은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불건전하며 합당한 대처방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의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이러한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억압이나 무관심으로 대처하거나 일부 대형교회들이 구상하듯이, 주말교회나 전원교회로 주5일근무제 등 안식일-주일에 대한 논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물론 기존교인들의 휴가욕구와 기존교회들의 일요일예배 참여 유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방이나 농촌지역의 교회들과 연계하여 도움을 주고 섬기는 프로그램보다는 일부 대형교회들이 휴양지나 지방에 분점교회나 예배의식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안식일-주일논쟁이 이해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제3자들에 의해서도 학술적이고 객관적이고 실제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4) 일요일에 세속적 노동의 중단과 예배의식에 참여 및 교회봉사라는 측면보다는, 쉼과 예배, 그리스도와 구원, 종말적 임재> 그리고 <정의와 자비와 인권>이라는 신구약성경의 안식의 개념의 이해와 실제화가 본 논의의 중심으로 다루어야 한다.

    5) 소위 주일예배는 한시간 정도의 '예배' 퍼포먼스 그 이상이라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의 일요일예배의식이란 특정한 '하루'동안 나머지 6일의 삶의 영역에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즉, 그리스도의 주권인정과 주권의 확장)와 그가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안식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신앙공동체내에서 실현되고 예시되는 한에서만 의미가 살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식은 신약시대의 공동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의 한 부분과 영역이었지, 삶과 괴리된 현재와 같은 하나의 '지켜야' 할 의식(儀式)이었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의 의미는 단순히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의 의식적 차원도 아니고, 선별적이고 자의적인 측면에서의 안식일엄수주의가 아니라, 창조의 질서와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본래의 뜻이 인지되고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2008. 6. 14. 23:35 일상/교회

    침례교도들의 주된 관심이 세례(침례)식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이다. 침례교도들의 확신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영성에 근거되어 있으며 신자들에 대한 세례(침례)는 오직 이에 대한 추론에 따라, 그리고 신약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시행된다. 침례교도들이 취하는 신학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Ⅰ. 교회의 구성원
    침례교도들의 신앙에 따르면 교회는 성령에 의해 거듭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이며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살아있고 직접적인 앎은 교회 구성원에 있어 기본적인 것으로 주장된다. 이러한 주장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상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고 있다. 기독교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출생이라고 하는 우연적인 사건이나 특혜에 근거되어 있지 않으며, 기독교 국가나 기독교 가정에 근거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란 구절을 삭제하여 자체 교회의 정의를 내림으로써 영국 국교와 장로교회의 견해를 거부한다. 교회 구성원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자의적으로 입교된다는 것과, 오직 신자만이 세례(침례)식에 참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비록 모든 교회 구성원이 은사에 있어서는 각각 다르지만 신분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일하다.

    Ⅱ. 교회의 성격
    침례교도들의 확산은 일종의 제도적이거나 지역적인 교회 개념을 주장하지 않고'회집 교회' 개념을 주장한다. 교회 구성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생명과 봉사의 친교로 결속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함께 살 뿐 아니라, 성령에 의해 조성되고 유지되는 친교를 맺을 것을 약속한다. 이러한 의미의 교회는 자체의 지교회에서 가장 명백하게 인식된다. 따라서 비록 가견적인 교회가 하늘과 땅에 있는, 과거, 현재와 미래의 모든 구속받은 자들로 구성되긴 하지만 또한 신자들이 복음에 의한 친교로,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서 함께 살고 있는 곳은 어디에나 교회가 존재한다고 참으로 말할 수 있다.

    Ⅲ. 교회 정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실 뿐 아니라 최초의 침례교도들은 자신들이, "구속자의 면류관"이라 부르던 것을 진심으로 옹호하였다. 지교회는 자치적이며 그 정치 원리는 종종 "교회들의 회중 질서"로 묘사된다. 침례교도들은 자체의 업무들을 처리할 지방 교회의 능력을 믿을 뿐 아니라, 교회 정치의 상관적인 제도들(감독제, 장로회제, 감리교파)에 대조되는 지교회의 신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자체의 명칭을 "침례 교회"(the Baptist Church)라 말하지 않고 일정한 지역에 있는 "침례 교회들"(the Baptist Churcher)이라 부른다. 교회들의 회중 질서, 곧 교회 정치는 지방 회중의 생각에 따라, 민주정체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개념과 동등시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민주정체란 말로 표현하기란 너무나 졸렬하고 빈약하기 때문이다. 침례교도는 교회가 목사들의 명령이나 보다 높은, 혹은 상회 조직 하의 재판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지교회 성원들의 마음에서 성령의 음성을 통하여 치리되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엄격한 의미의 민주적 교회 정치에 있어서는 교회가 교회에 의해서 통치 되어야 하듯이, 침례교도들의 입장은 교회를 통한 교회 정치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정한다. 모든 교회 성원의 신분의 동등함과 은사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첫째, 각 성원은 지교회의 정치에 있어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다는 것과 둘째, 교회는 선택된 지도자들의 지도를 기꺼이 받아 들인다는 것이 인정된다. 침례 교회는 보통 자체의 정치에 있어 독자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독자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침례교도들은 언제나 교회들간의 제휴의 위대한 가치를 인정해 왔으며, 침례 교회들의 제휴는 수세기 동안 챔례교도들의 생활의 특징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제휴는 자의적이며, 침례 교도의 연합 혹은 침례교도의 세계 연맹이 침례교도의 공동체와 동시적인 것이라고 가정하는 오해를 범해서는 안된다.

    Ⅳ. 교회의 의식
    교회 의식을 셋으로 말하여 설교를 포함 시키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교회의식은 보통 두 가지, 곧 신자의 세례(침례)와 성찬으로 언급된다. 침례교도들은, 성례란 말이 그 자체에 집중시켜 온 어떤 성직 개념들 때문에 성례보다는 의식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였다. 의식이란 말은 그 자체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권위를 가리킨다. 침례교도들은 성찬 예식을 쯔빙글리의 견해에 따라 집행한다. 빵과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의 구원하는 은혜에 대한 증거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가치는 실제의 빵과 포도주 자체보다는 훨씬 더 그것들의 상징에 있다"(Dunkin), 헨리 쿼(Henry Cook)은 다음과 같이 쓴다. "그것들(세례(침례)와 성찬식)은 복음의 핵심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상징함으로써 신자의 마음 속에,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능력의 활력을 부여하고 풍성하게 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신을 성령에 의해 전달할 수 있다는, 경외와 사랑과 기도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침례교도들은 세례(침례)와 성찬식이 은혜의 방법이며 복음에 대한 설교 역시 그러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견해는, 그러한 의식이 은혜의 특별한 방법일 분 특별 은혜의 방법은 아니란 말로 요약되어 왔다. 신자의 세례(침례)와 성찬식은 교회 의식들이라는 것, 곧 그것들은 개인적인 행위보다는 회중의 행위라는 것이 이러한 주제에 대한 침례교도들의 견해의 일부이기도 하다. 침례교도들은 성직자들의 중재를 몹시 싫어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 그러한 중재는 유일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신자의 세례(침례)에 대한 상세하게 논한 기사를 위해서는 '신자의 세례(침례)' 항목을 보라.

    Ⅴ. 교회의 직무
    교회의 직무는 교회의 친교만큼이나 광범위하지만 그러나 교회 직무란 말은 지도력을 목적으로, 감독과 제도상의 의무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 적용되어 왔다. 침례교도들은 사제적인 계급 의식에서 성직을 믿지 않는다. 침례교의 목사는 목사가 아닌 사람보다 은혜를 '더'받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공적인 직무에 의해 교회의 가장 작은 회원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서지 못한다. 그러나 은사는 다양할 뿐 아니라 섬김의 은사는 바울 자신이 에베소서 3:8에서 암시했듯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인정된다. 비록 목사와 집사가 자주 침례교회의 보다 넓은 친교 관계에서 임명되긴 하지만, 그들은 지교회에 의해 뽑혀 임명된다. 침례교 목사는 하나님의 내적인 부름에 의해 임명되는데 그러한 부름은 교회의 외적인 부름에서 확신을 얻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공적인 인정은 성직 수임식에서 받게 되는데 그러한 수임식이 어떤 보다 우수하거나 성직자적인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교회 자체 내에서의 섬김을 인정하고 질서있게 할 뿐이다. 성직 수임식의 중요성은 교회 자체가 목사를 통하여 설교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비록 성직 수임식이 성령의 활동을 교회법적으로 임명된 설교자들의 한계 내로 제한시키려고 의도된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이름으로 말해야만 하는 자들의 합당한 위임에 주목할 만한 중요성이 있다.

    Ⅵ. 교회의 보편성
    1920년 램버스 회의(the Lambeth Conference)에 의해 발행된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호소"(Appeal to all Christian Believers)가 침례교회에 의해 경건문으로 인정되었다. 이 교회들은 1926년에 다른 교파들에 관하여 침례교도들의 견해가 솔직하게 상술되었던 방식으로 한 응답서를 출간하였다. 그 해 리드스(Leeds)에서 침례교도 연합 총회에 의해 채택된 이 응답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주시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섬기는 모든 사람들 중 보다 큰 화합에 대한 갈망과 기도로 영국의 형제들과 연합한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 유일하시고 절대적인 권위로서, 성경에 계시된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구주이신 주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복종할 뿐 아니라, 각 교회는 그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할 자유를 갖고 있음을 우리는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견해를 취하는 자들의 양심을 심판하지 않으나, 우리는 그리스도 하에서 각 교회의 자유의 이러한 원리가 성경의 인가와 역사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것이 아닌 한 이러한 원리를 저버릴 수 없다. 더우기 우리 주의 주권과 유일한 권위는 그의 교회 안에서 자체의 자유를 해칠지도 모를 국가와의 어떤 관계를 제외시킨다는 것은 명백하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램버스 호소(Lambeth Appeal)에 의해 야기된 특별한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한다...". "우리가 교회는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세례(침례)는 우리 중 오직 회개와 믿음에 대해 개인적인 고백을 하는자들에게만 베풀어진다...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 대한 세례(침례)가 우리의 판단으로는 기독교 신자들의 친교로써의 교회의 개념을 전복시킨다...". "우리들 교회는 성찬식을 정규적이고 헌신적으로 준수한다. 우리에게 있어 성찬식의 가치는 우리 주의 임재와, 우리가 그의 구속적인 희생을 명시하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 들이는 믿음에 있으며, 성찬식 집행자의 공적인 지위나 봉헌의 말로 인한 빵과 포도주에 있어서의 어떤 변화에 있지 않다.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주의 성만찬의 완전한 효력이 감독 제도의 의식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명백성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posted by 좋은느낌/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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